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온갖 병명을 지어서 핑계를 댈 수 있다. 모든 것의 이유가 있다고 핑계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이만한 고통쯤은 참을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거라고 되뇔 수 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죽음에 관한 책을 선물 받았고, 서문을 읽다가 멈췄다. 지금이런 책을 읽기에 적합한 시기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멈췄다. 우울증이 심하던 시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으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었고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고 나나를 읽었다. 주홍글씨를 언제 읽었는지, 윌리엄 포크너를 언제 읽었는지 모르겠고, 카뮈도 언제 읽었는지 모르겠다. 카프카도 중학생 때 읽었다. 내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을까. 난 여전히 그들의 말하는 인문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인간 내면의 깊은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파고드는, 나를 바깥으로 내놓은 작품들을 좋아하며 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쓸 수 있을까, 그런 용기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없다. 그래서 자꾸 바깥으로 맴돌고, 맴돌고, 나아가질 못하고 멈춰있다. 내려놓지 않으면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서워서 하지 못한다. 죽음이 코 앞으로 와있다고 느끼니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불안은 그런 데서 비롯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들었던 말이 있다. 한 사람에게만 들은 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들은 말이다. 하나는 내 글은 현실적이지 않고, 이해하기가 어렵고, 외국 소설 같고, 어둡고, 때로는 장르적으로 스릴러 같고, 날 것 그대로의 문장, 그리고 구어체와 번역투가 섞인 만연체라는 것. 칭찬도 비판도 아닌 그저 평가. 평가, 나는 막상 내 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무언갈 따라 하다만 졸작이거나 뭐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옮은 문체가 아닌가 그 정도로 생각하고 결국 내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느낀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포기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축복받은 나라에 태어났지만 감히, 오만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스트레스가 취약하고 정서적으로 예민한 나에게 한국은 정말 멀고도 가까운 내 나라다. 차라리 내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묶어둘 수 있는 외부의 상황을 바라기도 했지만 그건 곧 죽음뿐이라 결론은 같다. 태어났고, 상황은 놓여있고, 나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고,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정신없이 일하는 것에 취해서 돌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컨트롤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다독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 와서 희생하라고 하면 정말 희생할 수 있을까. 모르지. 모르겠지만, 왠지 막연하게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정당한 희생이라고 여기면서 행복하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일 보다 무엇이든 나은 거 아니겠나. 아파서 죽든, 무엇을 해서 죽든.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들을 모두가 슬퍼하고 걱정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숨기는 수밖에 없다.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지게 되고, 글을 쓰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숨이 막힌다. 계속해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물질적인 것들,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어떤 존재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 이유가 있다고 느낄 수 없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잊히는 외로움, 혼자라는 외로움이 죽음이 공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말해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왜 그렇게 생각할까, 왜 그렇게 느낄까. 알 수 없다.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해 줄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살아있어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사랑을 내가 줄 수 있으니까, 나 또한 그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 있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내게 죽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봤다. 어제도, 오늘도, 죽고 싶다고 얘기하고, 혹은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잘은 모르지만 실제로 죽은 친구들도 있고, 불미스러운 사고로 살해당한 친구도 있다. 모두 내 마음속에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나를 위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고, 가끔 도망칠 공간이 필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