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설레었다. 6년 전 첫 산티아고 여행 때 아구스틴을 만났었던 알베르게로 향하는 날. 오늘은 어떤 일이기다리고 있을까.
나그네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늘어선 캄포 언덕에 도착했다. 오르기 힘들었던 그 길 끝에서 모두들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어가려고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기타를 빼어 들었다. 어제, 내 노래를 듣고 좋아해 주며 영혼의 양식이라고까지 말해 주었던 폴린과 제프릿 그리고 러셀도 함께 였다. 머리칼을 흩날리도록 세게 부는 바람 속에서 피곤함을 노래에 실어 날려 보냈다. 노래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한 청년이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는 산티아고까지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청년의 장난스런 말에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러셀과 호흡이 맞아 같이 걷기 시작했다. 무릎이 아파서 쉬어야 할 때 날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내 걸음 속도를 맞춰 주셨다. Obanas 에서는 아예 자리를 깔고 쉬면서 그에게만 노래를 불러 주었다. 노래 속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도 해드렸다. 그때 저 만치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한국인이었다.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서로 기뻐하면서도 짧은 인사만으로 이내 헤어졌다. 낯선 이국 땅에 나온 이후로, 비슷한 외형의 아시아인만 만나도 반가웠다. 게다가 한국인임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면 미소부터 번진다.
다시 걷기 시작하고 나서는, 러셀이 나를 따라잡지 못하셨다. 나는 그대로 내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약속도 없이 제 갈길을 갔다. 6년 전 들렀던 그 공립 알베르게에서 영준이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부지런히 걸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으나, 내 자리는 또 없었다. 영준이와 내일 만날 약속을 하고, 오늘은 서로 다른 숙소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내일 영준이가 나를 따라 잡거나, 쉴 만한 곳에서 영준이가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에겐 카톡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을 끝자락에 가 보니, 숙소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이쿠, 오르막길이었다. 다리는 아프고, 가방은 무거웠다. 삐질삐질 땀은 나고, 지쳐서 기어가다시피 올라 숙소에 다다랐을 때, 캄포에서 만났던 청년이 반가이 인사를 건네 왔다. 알베르게에는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을 만큼 힘 들었다. 물이나 한 잔 하고 이동해야지 하고 있는데, 자리가 났다며 주인이 나를 불렀다. 아이쿠 살았네. 옆에서 한 아주머님께서, 낮에 내 노래를 들었었는지 반가워하며 좋아해 주었다. 빨래도 하고, 빵도 먹고, 바람도 쐬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영준이에게 카톡이 왔다.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그곳에 한국인 친구들이 여섯 명 정도 머물고 있는데, 그들 중에 변충기 선생님 따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런 인연이. 변충기 선생님은 우리 삼무곡 가족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통나무 건축가님이셨다. 따님은 한국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온 이국 땅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다니. 푸엔떼 라 레이나는 나에게 신비한 만남을 주는 장소다.
영준이와 만나기로 약속은 했으나, 우리는 과연 어디쯤에서 볼 수 있을까. 이른 새벽 출발했다. Estella로 가는 길은 아직도 많은 곳이 기억에 남는다. 몇 번이나 되뇌었던 길인지 모른다. 어느 예쁜 동네에 마당이 넓은 바(Bar)가 보였다. 적지 않은 순례자들이 여기저기 앉아 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저기 멀리 다리를 꼬고 앉아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 영준이가 한눈에 보였다. 보자마자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재미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길에서 헤어졌다 만나고, 잠도 따로 자기도 했다. 이 길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남겨주고 있다.
지난밤 영준이는 누나들과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반가웠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엄마한테 보내드릴 사진을 찍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만나기로 하고, 우린 또다시 헤어졌다.
우리의 서로 다른 걸음 보폭과 속도에 맞추려면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 없다. 영준은 어리고 힘이 있고 빨랐다. 그가 즐기는 방법과 내가 즐기는 방법이 달랐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했기에 서로 헤어져 따로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알베르게 걱정도 있기는 했지만, 나는 빨리 걸을 수도 또 빨리 걷고 싶지도 않았다. 노래도 부르고 싶었고, 천천히 걷고도 싶었다.
동네가 눈 아래로 넓게 펼쳐 보이는 돌계단을 만났을 때, 앉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나던 이들이 하나둘씩 옆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엄마에게 보낼 사진을 함께 찍어주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제의 그 청년과 친구들도 있었다.
Estella에 도착해서, 드디어 변 선생님 딸 하은과 그의 동행자 다희를 만났다. 그리고 어제부터 인사를 하게 된 청년과 그의 친구와도 통성명을 했다. 로베르토와 기타리스트 장 프랑코. 오늘은 추석. 명절을 맞아 우리는 호박전을 부쳤고, 다희는 감자 소시지 채소 볶음밥을 만들었다. 장 프랑코 일행들과 나누어 먹었다. 물론 그들이 만든 음식도 나누었다. 기념으로 작은 콘서트를 열기로 결정했다. 친구들도 듣고 싶다며 나서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Estella의 안쪽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공연장으로 딱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알베르게에 머무는 순례자들 거의가 내 주변에 둘러앉았고, 창문에도 걸터앉아 내려다 보기도 했다. 장 프랑코의 생일 축하 노래와 연주, 그리고 한 여인의 멋진 기타 연주와 노래도 들었다. 모두 자발적으로 진행했다. 어떤 분은 꽃도 주셨고, 티에리라는 스위스분은 기념품을 주시기도 했다.
나의 여행길에서 내가 기념하며 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한 것뿐인데, 들어주시고 축하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혼자 걷기 위해 오신 심영애 선생님께서는 언제 또 만나겠냐시며 악수를 청하셨다. 독일에서 오신 한국인 부부와 미국에서 오신 한국인 부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수연, 수정 씨까지. 한국인이 아주 많은 밤에 즐거운 공연이었다.
로스 아르코스 가는 길에서 완전 기막힌 자리에 위치한 바(Bar)를 만났다. 자동차를 이용한 바(Bar)가 허허벌판에 있는데 처음엔 많이 놀랬지만 이내 목이 마른 나그네에게 잠깐이라도 쉼이 되어주고 있어서 약간은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나그네들의 지친 걸음을 쉬게 하는 것이 자연이 아닌, 인간의 편의에 치우쳐 또 다른 것이 차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설명 못할 이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 나는 매일 물을 한 통씩 꼭 들고 다녔었다. 그게 당연했고, 그런 수고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내 물이 아니던가.
이틀 만에 러셀을 다시 만났다. 시원한 맥주와 샌드위치를 사 주셨다. 어제는 재미있게 보냈냐고 궁금해하셨다. 생일이어서, 콘서트를 했다고 하니,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시겠다고 했다. 아니라며 손사래로 사양하고 헤어졌다.
로스 아르코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광장으로 산책을 나섰다. 광장에서 한 여인이 다가와서는 오늘 내 노래가 너무 좋았다고 하시면서 보라색 팔찌를 선물로 주셨다. 선물을 받고 돌아서는데 러셀을 다시 만났다. 맛있는 것을 먹자시면서 당신이 머무시는 호텔로 인도하셨다. 맥주도, 팔찌도, 식사도 대접받았다. 내가 뭘 나눠 주었더라. 복 받은 날이었다.
내일, 러셀은 택시를 탈 것이라 하셨다. 많이 힘드셔서 택시를 이용하려 하니, 혹시 무릎이 많이 아프면 택시를 같이 타자고 하셨다.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영준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영준은 지난 이틀 동안 많이 걸었다. 게다가 어제와 오늘은 알베르게를 어떻게 해서든 구해 보겠다며 내 크리덴시알을 가지고 걸었다. 그래서 영준이가 내일은, 내가 먼저 가서 숙소 등록을 해 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염치 불고하고 러셀의 호텔을 찾아갔다.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아 문틈으로 메모를 넣어두고 왔다. 내일 열 시까지 오겠으니, 나를 기다려 줄 수 있으면, 같이 가고 싶다고. 아…떨리고 떨리네.
다음 날 아침, 러셀이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영준이는 아침 일찍 산티아고 가는 길에 들어섰다. 러셀이 지난밤에 메모를 읽기는 하셨을까 걱정이 되었다. 호텔 앞 공원에 앉아서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러셀의 방을 찾아갔다. 옷을 입고 가방을 정리 중이셨다. 지난밤 내가 두고 갔던 메모를 확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우리가 탄 택시는 순례자들이 걷는 길을 지나쳐 쌩쌩 달렸다.
로그로뇨 알베르게는 6년 전처럼 여전히 깨끗하고 좋았다. 대문 앞에 가방을 놓고 다시 광장으로 나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러셀과 커피를 마시며 그의 여행이야기를 들었다.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갔더니 영준이와 하은과 다희가 도착해 있었다. 만일 내가 여기에서 머문다면, 자기들도 여기 있겠다고 했다. 아. 이런 기분이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두근두근하기까지 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함께 식사하고, 알베르게 순례자들과 공연을 만들어 즐겼다. 친구들은 환호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어제 만났던 한국인 부부께서 멜론을 나누어 주셔서, 우리는 마실 것으로 답례했다. 노래하고 걷고 먹고 마시고. 그것이 일상이다.
그 안에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