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 그대로 내 걸음으로
시모네와 동행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그러길 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것이 기뻤다. 서로를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다. 그는 우리 중 걸음이 가장 빠르다. 어느 정도 함께 걷더니만, 그는 빨리 걷고 싶어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으니, 내 기타를 자신이 매고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비가 와서 거리에서 노래도 하지 못할 테니, 감사한 마음으로 내주었다. 마음을 다해 내 기타를 자신의 배낭에 메고 휑하니 가 버렸다.
천천히 내 걸음으로 걸었다. 아. 그런데 그렇게 멀 줄이야. 그나마 온 힘을 다해 걸어서 큰 비가 내리기 직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서 여유로웠던 친구들 모두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모두들 내가 살아서 도착한 것을 기뻐해 주었다. 이젠 영준이 만이 아니라, 다희 하은 로베르토 실비아 시모네 비아트 까지 기다려 준다. 그리고 로베르토가 만들어준 저녁 식사는 오늘도 맛있었다.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다.
아침에 인사를 하고 나그네들과 헤어지는데, 뭔가 어색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다시 못 볼 것처럼.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보자고 하고 헤어졌다. 걷고 또 걸었다. 내가 느려서 못 좇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베가에 들어서자마자 조금 속도를 내야겠다 싶었다.
첫 번째 만난 알베르게에서 가방을 고쳐 메고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영준이와 다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이 동네에서 머무는구나. 그런데 로베르토와 그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 마을로 걸어갔고, 남은 일행들은 지치기도 한 데다가 하은이가 발이 많이 아파서 멈추기로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느린 것도 배려해서 이미 예약도 했으니 이곳에서 머물자고 했다.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먼저 걸어 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내일 내가 좀 더 빠르게 걸을 수 있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베가에 머문 덕분에 심영애 선생님과 정식으로 식사를 같이 하고, 보다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한 노인 분께서 다가오셨다. 좀 전에 거리에서 내 노래를 들었다고 하셨다. 자신의 영이 많이 위축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천사의 목소리를 들어서 다시 힘을 얻었다는 표현을 해 주셨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당황스럽고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 스멀스멀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어디서 이런 칭찬을 또 듣겠는가 말이다. 넘치는 칭찬이었다.
영준이와 다희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 나갔다. 심선생님도 빠르게 걸어 나가셨다. 나는 하은이와 함께 걸었다. 하은이는 걸을 수 있는 데까지만 가기로 했고, 나는 까리온까지 가 보겠다고 하면서 크리덴시알 카드를 영준이에게 맡긴 상태였다.
하은이는 중간중간 힘들어했지만, 조금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말리지 않았다. 함께 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아픈 발로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우스웠고 행복했고 즐거웠다. 지나치던 한국인 자전거 나그네가 멈춰서 우리의 모습을 보며 즐겁게 인사를 건네 왔다. 흥분되고 즐거운 하루였다.
까리온에 도착했을 때, 하은이는 몹시 지쳐서 힘들어했고 그녀의 발은 이미 물집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희와 영준이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에 자리가 없다고 했지만 우리는 주저함 없이 들어갔다.
서로를 끌어안은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 같이 반가워했다. 로베르토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아 들어 올렸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이 저녁이 너무 좋아서 모두들 한껏 흥이 올랐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가기 전, 하은이의 침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잠깐의 토론이 있었다.
로베르토와 시모네가 여러 이야기를 하더니만, 로베르토가 자신이 결단했으니 자신의 침대를 하은에게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로베르토는 그 침대 옆에 담요를 잔뜩 깔고 침낭 속에서 자겠다고 했다. 자신의 결단을 따라 달라고 했다. 왜 이렇게 착한 거냐고 왜 그런 거냐고 했더니 그게 자기라고 했다. 착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상냥했다. 세상 칭찬을 다 가져다 그 앞에 놓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저녁식사 후, 친구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래야 했다. 내일이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모두들 걸음이 달라서 자기 걸음으로 걷고 싶어 했다. 그랬다. 자기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그동안 불렀던 노래들을 모두 부르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불렀다. 편지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너를 내 눈에 담아 너를 내 맘에 담아…기억할게’.
노래가 끝난 후부터 우리는 모두 울기 시작했다. 로베르토와 다희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로베르토는 거의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난 울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게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편 너무 허하고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새벽 일찍 눈을 뜨고 세수를 하는데, 계속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같이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우린 결국 헤어졌다.
로베르토는 발이 아파서 하루를 쉬겠다는 하은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어제 다른 곳으로 갔던 실비아가 여기로 도착하면 셋이서 함께 걷겠다고 했다.
걸음이 빠른 영준은 시모네와 다희와 같이 걷기로 했다. 영준이는 완주증을 목표로 걷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 또한 완주증을 받기 위해서는 시리아에서 영준이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다가 시리아로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 프랑코와 린다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자신의 걸음 속도에 맞춘 팀을 나누어 헤어졌다. 걷고 또 걸었다. 괜찮았다. 그런데, 왠지 모를 울적한 마음이 들어왔다.
그 조용한 아침, 누군가 나를 불렀다. 유빈 마이 유빈….오마이 갓, 오리손에서 만났던 한스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아는 이가 없을 수도 있어. 내 걸음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그런데 다시 만났다. 아.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아쉬운 인사를 하고 또다시 헤어졌다. 우리의 걸음은 달랐기 때문이다.
점심때쯤, 오른쪽 발의 물집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한 무리의 나그네가 보다 못해 나를 세웠다. 자신의 응급 처치용 밴드를 주셨다. 내가 밴드를 부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헤어졌다. 그들이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다시 만나면 들려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혼자서 터덜터덜 도착한 알베르게에 침대가 없다는 말은 내게 서러움을 불러왔다. 남은 자리도 없고, 다음 마을은 5킬로미터 정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또 걸었다.
도저히 발이 아파 걸을 수 없어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그때, 한 여인이 다가왔다. 프랑스인이었다. 말괄량이 삐삐 같은 이 처자는 노숙이라도 괜찮지 않겠냐며 걷자고 했다. 같이 가기 원한다면 천천히 걷겠다고 했다. 난 이미 지나는 자동차라도 얻어 탈 기세였다. 그녀를 보면서 힘을 내어 걸었다.
마침내 다음 숙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랫소리가 들렸다. 장 프랑코였다. 린다, 심영애 선생님, 한스, 그리고 아침에 만났던 나그네들이 보였다. 장 프랑코를 발견한 순간 나는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린다에게 매달려 울어 버렸다.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 진짜 힘이 들었다.
그런데 프랑스 친구는 가격이 비싸다고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남기로 했다. 노숙이라도 하려 했었고 같이 걸어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에 맥주 한 잔을 대접했다.
저녁 식사 후, 한스는 내게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다. 낮에 만나 밴드를 건네주었던 나그네들에게도 노래를 들려 드리고 싶기도 했다. 장 프랑코는 기꺼이 내 노래에 반주를 해 주었다. 그 어느 때 공연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밤이었다. 심영애 선생님께서도 많이 좋아하셨다.
결심했다. 완주증을 포기하기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보낼 시간이 없다니. 완주증을 위해, 헤어져 걷기보다는 차라리 함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내일 그들이 어디까지 오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걸어 보고, 그러고 나서 만날 수 있다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다. 분명한 것은 완주증을 위해 걷지는 않겠다.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왜 이 선택을 오늘에야 했을까. 어제 결정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다시 평원으로 나오면서 걸음이 빠른 이들은 먼저 갔다. 그런데, 난, 난 왜 빨리 가고 있는 것인가.
한스를 만났고, 물집으로 고생한다고 도와주신 분들도 만났을 때 느낀 것 같다. 나는 이곳에 사랑받으려 왔구나 사랑받고 싶어서 왔구나. 로베르토가 마사지해주고 밥 해주고 사랑해주고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 힘이 나는 것을 보니, 난 여기 행복하고 싶어서 그래서 왔나 보다.
아. 행복하다.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포기한다. 완주증.
9월 28일까지 걷고 29일에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를 탈 것을 결정했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걷고 싶다. 그저 무리 없이 걷겠다는 결정일뿐이다.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 마음의 결정에 따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