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을 나이지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받는 순간 보험이나 핸드폰 요금제 가입을 권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세 번이나 받지 않았던 전화였다.
그는 내가 시에라리온에 방문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내가 다녀온 적이 있다고 답하자 그는 곧바로 현우의 이름을 댔다. 처음에 나는 현우가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고, 그래서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과 알면서도 혹시 몰라서 말을 아끼는 것 중 어느 쪽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을 아끼는 것이라고 대꾸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 현우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나는 무슨 일로 현우를 찾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현우의 귀국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아무리 애걸해도 현우가 도무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한다며 하소연했다.
“당시 유현우 씨에게 특별히 가해진 물리적 충격이나 학대 등이 있었습니까?”
그가 말하는 당시란 정확히 언제의 일을 지칭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현우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여섯 달 전이었는지, 열 달 전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몇 년 전의 이야기인지 긴가민가했다.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럼 당시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정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어째서인지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
나는 시에라리온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공항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함께 왔던 일행과 내 여권을 들고 있을 가이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공항은 그리 크지 않아서 30분 정도면 내부를 대충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30분 안에 공항을 돌아보는 것과 일행을 찾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들이 이미 공항을 떠났으리라 생각한 나는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애초에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밖에서 찾으려던 시도는 잘못된 것이었지만 나는 친절하게도 영어로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데다가 더욱 친절하게도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되어 있는 ‘POLICE’ 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무 책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길을 잃었으며 일행을 찾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짧은 영어로 더듬더듬, 그렇지만 꽤나 적극적으로 전달했다. 그는 내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질문의 본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수요일 점심
“그럼 당신은 한국에서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한국에서 온 것은 맞지만 길을 잃은 건 이곳에서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가 한국인 관광객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나에게는 여권은 고사하고 여권 대신 쥐어 줄 수 있는 약간의 돈마저도 없었다.
“당신 범죄자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여권이 없어?”
나는 아마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이 범죄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신분은 어떻게 확인하지? 오늘 갈 곳은 있어? 잘 곳은?”
그가 던진 모든 질문에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그는 답이 없다는 얼굴로 나를 이끌고 경찰서를 나서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에 자리한 녹슨 철제 울타리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뒤뜰과 호화로운 화단을 가진 허름한 단층 건물이 보였다. 정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 있던 한 남자는 나를 데리고 온 경찰관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 쪽으로 돌아서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쓰리 데이즈, 쓰리 데이즈 모어” 와 “유어 패스포트.” 라는 말을 그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들은 수많은 방으로 통하는 복도 앞에 서서 나를 어느 방에 들여보내야 할지에 대해 한참 동안 떠들었다. 결국 그들이 기나긴 실랑이 끝에 나를 집어넣기로 한 곳은 제일 구석이라기엔 너무 햇빛이 잘 들고 가장 좋은 곳이라기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이는, 나무판자로 바닥이 깔린 방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 안에서 무언가 발견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를 앞세우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자 나를 따라왔던 경찰관은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고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는 잇몸이 활짝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유, 노 패스포트. 쓰리 데이즈 모어, 유 슬립 히어. 포 유어 패스포트.”라는 말을 남기고 나를 방 안으로 떠밀었다.
겉보기에 비해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닫혔다. 나는 유난히 눈부셨던 남자의 잇몸을 떠올리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딛는 곳마다 나무판자가 신음을 내뱉듯 삐걱거렸다. 방의 반대편에는 벽이 아예 없었다. 창문의 용도인지 출입구의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벽이 없어서 햇빛과 모래 먼지가 고스란히 들어오는 그곳에 어림잡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남자들이 제각기 다른 자세로 누워 있었다. 쪼그려 앉아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한 남자가 기다시피 하는 자세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남자들 중의 대부분은 나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기어오면서 내는 나무판자 삐걱거리는 소리에는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짜증을 내면서 남자를 나무랐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고,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니 나보다 키가 이십 센티미터 정도는 더 컸다.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그는 물었고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어쩌다가 오셨어요?”라고 한층 조곤조곤해진 말투로 재차 물었다. 그제야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환청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현우는 열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열아홉이란 나이가 소년에 가까운지 청년에 더 가까운지의 구별은 애매한 것이었으나 우선 현우의 겉모습만 놓고 보자면 소년, 그것도 생김새가 준수한 미소년에 가까웠다. 내가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하자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며 반색했다. 자기가 여기 온 지는 꽤 됐는데 여태껏 한국인은 고사하고 한 번 말할 때 세 마디 이상씩의 단어를 내뱉어도 별 문제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몇 살이에요?”
“스물다섯.”
현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친동생 대하듯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했다. 나는 바로 실천에 옮겼다.
“여긴 어디야?”
“불법체류자 수용소예요. 아마도요. 써 있는 게 그렇긴 한데 사실 여기엔 불법체류자보다는 그냥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이 더 많아요. 근데 저는 불법체류자 맞아요.”
현우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NGO에서 자원봉사를 나왔는데 오자마자 일행과 떨어지고 여권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여권을 잃어버려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며 현우는 기뻐했다. 그건 당연한 말인데, 여권을 잘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곳에 있을 리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우가 너무 천진하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바람에 곧 잊어버렸다.
현우는 자기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참 험난했더라고 털어놓았다. 남아메리카 배낭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바람에 모아 뒀던 돈이 원래의 목적과는 조금 다른 용도로 쓰였다고. 자기가 쏟아 부은 간호와 기도와 통장의 오백 만원이 무색하게도 아버지는 금세 돌아가셨고, 보험금을 받아 장례를 치르고 돈이 조금 남기에 그걸 들고 무작정 한국을 떠나왔다고 했다. 가장 먼저 여행한 나라는 모로코였고, 모로코에서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하자 그곳에 정이 확 떨어져서 그대로 시에라리온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고 했다.
“왜 시에라리온이었는데? 아니, 아프리카로 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내가 묻자 현우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모로코 저가항공 프로모션 때문에 혹해서 샀어요. 여행에 가장 중요한 건 돈이잖아요. 마음 같아선 멕시코로 가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가기엔 너무 멀더라구요.”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후 가이드를 만나 첫 관광지로 이동하고 있는데 웬 할아버지가 트럭 앞에서 픽 쓰러지더니, 당신들 차에 치여 다리뼈가 골절된 것 같으니 돈을 내놓으라며 난리를 쳤다고 했다. 적당히 얼마만 쥐어 주고 보내자고 했던 현우와 달리 가이드는 뭐가 무서웠던지 아니면 내줄 돈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그냥 내빼 버렸고, 여권을 가이드에게 맡겼던 현우는 그대로 신분 미확인의 외국인 뺑소니범이 되어 이곳으로 끌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운전한 건 아니에요. 저는 조수석에 앉아만 있었어요.”
현우는 동조를 구하듯 웃었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말이 되나, 하는 얼굴이시네요.”
현우는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NGO에 계셨으면 이곳저곳 많이 다니셨겠네요. 그럼 많이 보셨을 거 아니에요.”
“뭘?”
“말도 안 되는 일이요. 그게 어디 드문가요?”
현우가 담요 하나를 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쭈그려 앉았다. 하필이면 점심식사 시간이 다 지나고 설거지까지 끝낸 시간에 와서 배고프겠다며 현우는 내게 작은 초콜릿 조각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주저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수요일 저녁
조악한 종소리가 울리자 죽은 듯 누워 있던 남자들이 커다란 몸을 이끌고 날렵하게 일어났다. 웬 손이 방문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사람 수를 세고는 그에 맞는 수프 접시를 방 안쪽으로 밀어 넣고 사라졌다. 남자들은 자기 접시를 챙겨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닫혔던 방문이 열리면서 어제 보았던 그 잇몸이 예쁜 남자가 들어왔다 - 현우의 말로는 그의 이름이 타투라고 했다. 그게 그 남자의 목 뒤에 있는 토끼 문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그의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모두들 그를 타투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자기를 따라오라는 뉘앙스였다. 대충 여권 확인 절차 비스무리한 말이 들려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대뜸 현우가 말했다. "혼자는 안 보내."
타투가 그를 쳐다보았고, 나도 그를 쳐다보았다. 현우는 대뜸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저 사람들이 무슨 짓 할 줄 알고 따라간다고 해요? 여긴 죄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뿐인데?”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현우는 타투에게 절대로 날 혼자 데려가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며 일갈했다. 물론 타투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타투는 진지한 얼굴로 투모로우와 팔로우 미를 힘주어 반복했다. 현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타투를 방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타투는 괴성을 지름으로써 현우를 설득하려고 해 보았으나 현우의 강경한 태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포기한 건지 두고 보자는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현우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현우의 미소가 참 예쁘지만 잇몸은 타투의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우는 나를 지켜냈다며 흡족해했고, 수프를 먹던 남자들은 익숙함과 한심함이 반씩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수프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비운 후 접시를 들고 뚫린 벽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들이 굳이 설거지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접시를 마른풀이 둥둥 떠다니는 물에 씻어 낸 다음 마룻바닥에 거꾸로 엎어 놓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들이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올 무렵엔 해는 이미 지고 없었다.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말을 했다.
“불 끌 거니까 얼른 누우라는데요.”
현우의 말에 나는 천장에 주먹 하나 크기의 알전구가 달려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나무판자 틈새마다 득시글거리는 벌레와 그 못지않게 득시글거리는 남자들 사이에서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현우는 자신이 옆에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현우의 옆자리에 누웠다. 현우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보다 여린 것 같은 그가 적어도 나를 해칠 순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불이 꺼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내게 중얼거렸다.
“걱정 마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예요.”
수프가 뱃속에서 출렁이는 느낌 때문에 차분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꾸 뒤척였다.
목요일 아침
눈이 떠지자마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뚫린 벽 너머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먼저 그렇게 하고 있던 남자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현우 없이 마주하는 그들의 눈빛 속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섞여 있었다.
한 남자가 돌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절대 그들을 쳐다본 것이 아니라 그들 너머의 뚫린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와 현우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현우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현우를 내려다보더니 현우의 옆구리를 발로 건드렸다.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현우가 몸을 뒤척였다. 그는 이번에는 현우의 어깨를 툭 찼다. 현우는 눈을 뜨곤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나를 본 현우가 ‘잘 잤어요?’ 하고 목이 잠긴 인사를 건넸다.
아침식사로는 멀건 죽이 나왔다. 각자 자기 그릇을 챙겨서 둥그렇게 모여 앉아 죽을 먹었다. 우리는 원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오고가는 활발한 대화의 -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현우는 원 안에 한 마디의 질문이 던져졌을 때 두 마디 이상의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매우 사교적이고 활발한 대화라고 했다 - 중심에 끼지는 못했다. 억지로 한 입 떠먹어 본 죽은 물에 밀가루 따위를 섞어 놓은 듯한 맛이었다. 건더기 하나 없는 희멀건 죽이었는데도 누군가는 그걸 먹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현우는 죽을 먹다 말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현우가 자리를 뜨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는 텁텁한 기침소리밖에 없었다. 이윽고 현우는 물 두 잔을 떠 와서 한 잔은 그에게 건네고 한 잔은 나에게 건네며 해맑게 웃었다. 죽을 다 먹기가 무섭게 모두들 자기 그릇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는 거야?”
내가 묻자 현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먹은 그릇이 아니더라도 씻어요.”
나는 내 그릇을 들고 현우를 따라갔다. 현우는 연한 커피색을 띠는 개울물에 그릇을 담갔다 꺼내기를 반복했다. 나는 다 씻어낸 그릇을 햇빛에 말리는 이유가 물기를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찝찝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설거지를 끝내자 모두들 세상을 전부 잃은 표정을 하고서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아직 점심때가 되려면 한참 먼 것 같은데도 방 안으로 스미는 열기는 살인적이었다.
내가 담요를 깐 자리 위에 앉아서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해 대자 현우는 나를 똑같이 따라하면서 이곳의 더위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요? 벌레도, 배고픔도, 찝찝함도, 더위도 아니에요. 여기 있으면 진짜 할 일이 없어요, 지루해 죽을 것 같아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무료해 하는 내게 현우가 물었다.
“뒤뜰로 나가 볼래요? 공도 있고, 좀 낡긴 했지만 줄넘기도 있고. 놀 건 많은데.”
“더워.”
“여기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아냐, 난 잘래.” 내가 담요 위에 드러눕자 현우는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선 뚫린 벽을 가로질러 곧장 화단으로 나갔다. 현우가 일으킨 작은 모래먼지 속으로 노란색 꽃 하나가 보였다. 꽃 이파리의 싱그러움이 반항적으로 느껴졌다.
현우는 뒤뜰에서 한쪽 끝이 해진 줄넘기를 주워들었다. 이내 줄이 바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의 줄넘기는 숨겨진 규칙성이 있는 듯 난잡해 보였다. 나는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두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