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이 무너졌다
스물세 살쯤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한참 축구경기를 할 때였다. 월드컵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새벽까지 우리나라 경기가 이어지던 날이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그날도 새벽까지 축구경기를 즐겁게 보셨다.
그날 아침, 자전거를 타고 볼일을 본 다음 집으로 잘 돌아오셨다. 그런데 그날따라 자전거를 타는데 균형이 잘 맞지 않고 한쪽으로 자꾸만 기울더란 것이다. 평소와 몸 컨디션이 달랐던 아버지는 집에 계속 누워계셨다고 했다.
그날 나는 집에 있었고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집에 계신 상태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기역자형 구조로 방이 다 떨어져 있었다. 요즘처럼 거실과 방이 연결된 아파트였다면 달랐겠지만 방이 다 떨어져 있으니 가족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엄마가 오시기만을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다. 나중에 가족들이 다 모여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119를 부르고 큰 병원으로 옮겼더니 뇌졸중이 발병한 것이었다. 뇌졸중은 시간이 중요하다. 골든타임을 놓쳐버리면 사망할 수도, 평생 편마비로 살아갈 수도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의 변화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터인데 설마 큰 병일까를 생각 못하고 조치를 취하지 못하셨다. 그도 그런 것이 집 바로 옆이 병원이었는데 어찌 병원에 가 보실 생각은 못하셨을까? 그때 나를 부르기만 하셨어도 바로 옆 병원으로 함께 가보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 당시 본인의 몸의 변화를 느끼고 속으로는 ‘나, 큰 병이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던 것 같다.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것 같다.
119에 실려 병원으로 도착한 아버지는 시간이 지체되어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병원은 양방, 한방을 같이 겸했는데 그 이후로 한 달 넘게 치료를 받으셨고 다행히 재활에 성공해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엄마와 우리들이 돌아가며 간병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상주해 계셨지만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언니랑 나랑 동생들이랑 수시로 왔다 갔다 했었다. 당장 본인 몸이 불편하니 옆에서 도와드려야 될 게 많았다. 쓰러지고 일주일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동생들보다 언니를 많이 찾았다. 이럴 땐 첫째가 많이 의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다음으로 나를 많이 찾으셨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나는 일을 마친 후 거의 매일같이 병원을 들렸다. 아버지의 상태가 궁금하기도 하고 엄마를 교대로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재활에 성공했지만 한쪽이 마비가 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 절망적이었다. 분노와 부정이 한데 엉켜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심적으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여러 명이 사용하는 병실에는 왕고참 아저씨가 있었는데 이 분이 텃세를 부리셨다. 자리도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계셨다. 이 분도 아버지와 비슷한 병명이었는데 한 번씩 병원엘 찾아가면 이 분이 엄청 예민하게 구셨다. 밤에는 특히 아버지한테 더 그러셨다. 내가 매일같이 찾아가고 시간이 지나 서로 친해지고 나니 이분도 우리를 부드럽게 대해주셨다. 그리고 재활에 성공한 아버지가 퇴원해 가는 날 누구보다 더 기뻐해주셨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별나게 굴었던 그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한동안 절망과 분노의 시간을 보내셨다. 힘든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이겨낸 것은 우리 가족들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행히 아버지는 그 과정들을 거쳐 일상생활을 하시며 평생을 사셨다.
서예를 하는 아버지는 한쪽이 불편한 몸으로도 누구보다 열정적이게 임하셨다. 늘 글을 쓰시며 정진하셨다. 서예학원 곳곳 벽에는 아버지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붓과 펜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아버지는 쓰러지고 나면서부터 믿음생활을 시작하셨다. 평소에 달마대사 그리길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그 이후로 성경말씀을 적어 벽에다 하나 둘 걸으셨다. 수시로 성경말씀을 적어 믿는 분들에게도 많이 선물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들에게 한 권씩 주시기 위해 성경 필사를 5번이나 하셨던 아버지, 5권째 적으시다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아버지. 그걸 이어가기 위해 나는 매일 책상에 앉는다.
“한쪽이 불편한 몸으로 남은 여생 사시며 5남매 시집장가를 다 보내고 가신 아버지! 평생 존경하며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아버지 그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다시 볼 그날까지 천국에서 편히 계세요.” -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하는 둘째 딸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