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은...
사회 첫 경험 때 첫 월급은 38만 원이었다. 어째서 그랬는진 몰라도 첫 월급에서 8만 원만 내가 쓰고 집에 30만 원을 갖다 드렸다. 그 이후로 항상 월급의 3/4 정도를 집에 꼬박꼬박 드렸다.
3개월이 지나니 43만 원 48만 원 1년을 일하니 어느새 월급은 53만 원이 되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월급이 몇 개월 단위로 계속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재미로 첫 직장을 오래 다녔던 것 같다. 1년이 지나 보너스 100%와 휴가 때도 항상
100%가 나왔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새로 나오는 신곡들도 다 들어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에서 그렇게 재미나게 일했다.
여기서 꾸준히 3년을 일했고 마지막 받은 월급도 기억이 나는데 83만 원이었다. 회사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퇴직금을 받고 서둘러 나왔다. 회사가 끝날 때까지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한동안 일을 조금 쉬었다.
꼬박꼬박 집에다 월급의 일부를 갖다 드리다가 그게 끊기니 아버지로서는 걱정과 근심이 많이 쌓이셨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말이다. 10 식구의 가장으로서 짊어진 무게가 남다르셨던 모양이다. 그때 당시엔 아버지가 집안 살림 가계를 맡아하셨다. 상고를 나온 아버지는 계산이 빠르고 가계부 정리도 잘하셨다. 당장 내가 매달 가지고 오는 돈이 구멍나버리니 아버지도 멘붕 아닌 멘붕을 경험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이 맘 때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나는 나대로 일을 실직한 상태였고 월드컵 축구경기인가가 한참 열리는 시즌이어서 새벽 늦게까지 응원하다 주무시곤 하셨다. 그 당시 아버지 친구분들 사이에 몸 만드는 게 유행이었던지 집 마당에 역기를 마련해 두고 그것도 열심히 틈틈이 하셨다. 이 세 가지가 시너지를 발휘해 아버지를 쓰러지게 만든 원인이 된 것 같았다.
물론 뇌졸중이란 병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고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그걸 아느냐 말이다. 아버지도 자신의 건강을 늘 자부하던 사람이라 그렇게 큰 병은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재활에 성공해 일상생활을 하게 되시면서 어느 날 내게 그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때 내가 일을 그만둔 게 아버지한테는 크게 작용했다고. 물론 그 당시 언니와 나 동생이 다 함께 일을 해서 집에 조금씩 보탰지만 내가 제일 많이 보탰던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도 네 자매 중 둘째인 내가 제일 늦게 시집을 갔다. 3개월 뒤 남동생이 기다렸던 것처럼 바로 갔고. 그동안은 늘 집에 생활비를 보태드렸다. 심지어는 내가 실업급여를 타 먹을 때도 일부를 떼어드렸다. 아버지는 제법 놀라셨다. 이것까지 주냐고... 그래도 집에 이것저것 나가는 돈이 많으셨던지 미안해하시면서 받으셨다.
내가 둘째로 태어날 무렵 다들 아들이라고 예상했다는데 딸이어서 실망감이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라날 때부터 왠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비슷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직감?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살았다. 이 또한 운명적인 건가? 아들은 아니지만 아들 같은 딸로서 부모님이 나를 많이 의지하며 살 것 같단 그런 거 말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리고 집에서는 나를 집안의 기둥이라 생각하며 살았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그런 운명적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하나님께서 “너는 이 포지션이야. 너는 이 길을 감당해.”라고 하셨던 걸까... 지금껏 내게 주어진 일들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다. 지금 또한 거동이 불편한 89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가 선뜻 ‘내가 할게’라고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선뜻’하고 있다.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시어머니를 모셔보면서 더 경험하고 배우며 알게 되었다.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되는 그런 게 존재하니 말이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하다 보면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버틸 힘도 생긴다.
그래도 딸같이 대해 주시고 마음 써주시는 시어머니가 좋다. 비록 거동이 불편해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말이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몇 년의 추억과 시간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찐 사랑의 기억들로 자리할 것이다.
폭풍같이 흐르는 눈물 속에 그 값진 경험들이 녹아있다. 더 단단하고 빛나게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달란트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껏 꿋꿋이 살아왔던 지난 세월만큼 더 꿋꿋함으로 더 진한 진실함으로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보고 싶다. 때론 더한 넘어짐도, 더한 눈물도 경험할 것이지만 말이다. 내 방식대로, 나의 모습대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