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존중하는 일은
내 희생이 동반되어야만 했어"
올해 2월,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듯 이혼이 하고싶었다. 지난 6년간 어떻게든 참아지던게 안 참아졌고,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한 일주일간을 아이 둘을 등원보낸 후, 아침부터 아이들이 하원하기 전까지,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소리를 질러댔다. 남편이 실직해서 집에 있는 상태였다.
협의이혼신청서에 내 이름과 남편이름, 그리고 주소를 적고서 미성년 아이들의 친권과 양육권에 대해서 정하자고, 지금 못 정하겠으면 가정법원 가는길에 말하라고, 재산분할은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이들 양육비로 얼마를 생각하는지, 내가 옆에서 적겠다고, 제발 도장 좀 찍으라고, 이혼을 꼭 해야만 하는 챌린지처럼 차 키와 협의이혼신청서를 들고 남편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닦달했다.
남편은 재산분할 필요없다고, 너 다 가지라고. 이혼은 안된다고 했다.
남편은 단 한번도 이혼에 수긍한 적이 없었다.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이혼 할 때 하더라도 본인이 나쁜놈이었던 채로는 하고싶지 않았던 거다.
하필, 회사가 법인파산에 들어간 그 때, 시댁의 집과 건물이 모두 법인회사의 연대보증으로 넘어가고 경매에 붙여졌던 그 때, 남편과 시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된 그 때, 나의 상처는 곪아터져버렸다.
그간 크고 작은 상처에 약이라도 발라가며 다 낫고 다시 생채기가 나고 반복했더라면 이리 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나의 결혼생활에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나의 인내심이 그 때 바닥이 나버렸다.
어쩌면 매한가지 돈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나의 생각이 일맥상통 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처음부터 돈이 중요하지 않았으니 이혼하더라도 지금 재산분할을 청구하면 얼마 나오지 않을 이 때에 이혼을 해도 된다고 말이다.
늘 시어머니에게 도둑년이라 불렸던 남편의 전 부인이 이혼하면서 가져간 돈은, 본인이 혼수로 가져온 5천만원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도둑년이라고 했다.
재산이 있었을때 이혼했더라면 나는 시어머니에게 희대의 도둑년이 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약간의 희열도 있었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참아지던게 어느순간 아이들도 보이지 않을만큼 나는 이혼을 열망했고 갈망했다.
그 때는, 이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단 하루라도 제발 정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당신이 놀러나가기 위해선 내가 혼자 아이들을 봐야했고, 당신이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나에게 늘 부당함을 강요하는 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했어. 당신을 존중하려면 나의 희생은 늘 불가피했어."
"당신을 존중하는만큼 나도 존중받고 싶었어
희생을 강요받는 삶을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어.."
"당신도 시댁도 나에게 너무나 무례했어. 생각하기 싫은데 자꾸만 생각이나. 이제 좀 벗어나고 싶어. 이젠 아이들도 보이지 않아..정상적으로 살고싶어. 제발 나 좀 놓아줘.. 응? 제발 이혼 좀 해줘.. 나 좀 살려줘..."
남편에게 제발 이혼 좀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그간 화내고 소리지르며 협의이혼신청서를 들고 졸졸 쫓아다니며 이혼하자해도 꼼짝도 않던 남편은 그제서야 알았다고 했다. 이제 놓아준다고 했다.
남편은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신기하게도 나는 남편의 "알았어. 해줄게 이혼"이라는 한 마디에 눈물을 그쳤다.
처음이였다. 남편이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준 것이.
그게 협의이혼신청서에 도장을 찍는 일이었는데도, 기뻤다. 처음으로 내 말이 들어먹혔다는 기분에 나는 해방감마저 느꼈다.
"우리 결혼생활에서 시댁을 배제하고 싶어. 나의 가정엔 딱 우리 네 가족만 있는데 자꾸 시댁 가족구성원에 나와 아이들이 당신 밑으로 들어가 있는게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
남편의 해줄게 이혼, 이란 말의 나의 답변이었다.
"우리 가정을 깨면서까지 부모님 만날 필요 없어"
그 말이 내겐 "사랑해" 라는 사랑표현 보다도, "미안해"라는 자기반성이 담긴 사과보다도 감격스러웠다. 내가 원했던 건 어쩌면 이혼이 아닌 시댁과의 절연이였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매주 시댁을 만나왔다.
남편이 시댁과의 만남을 갖는 주도권을 내게 넘겨주자 오히려 시부모님이 짠하게 느껴졌다.
그간 70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단 한번도 망하지 않았던, 단 한번도 넉넉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본적이 없는 분들이라, 내 남편이 변한것처럼 시부모님들도 변했을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철이 없던 것이 "풍족한 경제력" 때문이었으면, 시부모님도 같은 이유였을거라고, 여직 철이 들 기회가 없어서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거라고,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를 처음으로 고민할 시부모님이 나에게 미안함을 느낄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짠하게 느껴졌다. 뭐 하나라도 더 해 드리고 싶었다.
집이 망해본 경험은 내가 먼저 겪어보았다고, 경험의 선배라도 된 것처럼 이 상황이 얼마나 허망할 것이며, 막상 생활비를 반의 반도 아니고 1/10로 줄여야 하는 현실의 버거움을 인생의 끝자락에 느낄 시부모님이 안타까웠다.
집에서 아침부터 황기를 넣고 몽근하게 끓여 동총하초와 전복과 토종닭을 넣어 삼계탕을 만들어서 냄비채로 시댁에 배달을 가곤 했다.
그런데, 그게 다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미안한 것이 없었다. 또, 철이 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연 것이 그들이 더 침범하여 오도록 내가 길을 터 준 격이 되어버렸다.
시댁은 본격적으로 굳히기 작전에 들어갔다.
"이제 세례만 받으면 되"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