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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키드니 May 20. 2024

어느 날 남편이 텃밭을 사 왔다

어느 날 남편이 텃밭을 사 왔다. 무려 4단짜리 스마트 팜이다. 큰 쇼핑 아이템을 지를 때에는 미리 나와 상의를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집도 좁아지는데 이런 걸 왜 샀느냐고 내가 반대할 것이 뻔하니 그냥 지른 것이다.


남편은 자칭 타칭 쇼핑왕이다. 우리 집 현관 앞에 쌓이는 쇼핑 박스의 팔 할은 남편 물건이다. 맥시멀리스트인 남편은 사고 싶은 것이 많다. 신제품이 나오면 꼭 사고 써봐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기승전쇼핑으로 끝이 난다. 가령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결국 옷이나 신발을 사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가 생각해 내는 쇼핑 품목은 내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세상에 이런 것도 팔아?' 싶은 물건들이다. 에어컨의 바람을 조절하는 바람막이 윈드가드, 커튼을 켜고 열어주는 자동커튼레인 등. 어떻게 검색을 해야 하는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아마 그는 코 풀어주는 기계나 벗은 옷 걸어 주는 기계도 나온다면 살 양반이다.


반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 필요한 물건도 고민 끝에 사지 않는다. 검색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지낸다. 쇼핑 좋아하는 남편과 살며 그의 쇼핑 아이템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무언가를 산다고 하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봤다.


이번엔 스마트 팜이 너무 사고 싶었던 모양인가 보다. 스마트팜을 일단 집안에 들여놓고 선구매 후통보를 해왔다. 그는 택배 박스를 뜯어 텃밭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우려를 이미 안다는 듯이 집 안은 자리를 차지하니 베란다에서 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집 밖 베란다에 있던 스마트 팜은 슬금슬금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스마트 팜 농작물이 자리기엔 베란다 온도가 안 맞아서였다. 그렇게 우리 집은 스마트 팜으로 물들어갔다.

2년쯤 지나니 그가 질렀던 텃밭의 최대 수혜자는 나였음을 깨달았다. 자고 일어나면 쑥쑥 자라는 바질 따서 견과류, 마늘, 소금을 넣고 바질 페스토를 만들었다. 텃밭에서 바로 딴 바질로 만드어 바질 향이 가득이다. 어디로든 날아갈 틈이 없다. 바질 페스토 한 스푼이면 샐러드도 파스타도 고급스러워졌다.



남편의 텃밭에서 탄생한 오이도 경탄스러웠다. 손바닥 크기만큼의 오이는 예쁘고 깜찍했다. 생긴 것만큼 맛도 좋았다. 도시 한 복판에서 밭에서 딴 오이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식탁에서 부족한 쌈야채는 그때그때 따먹는다. 가장 고무적이었던 건 편식 쟁이 딸아이다. 우리 집 딸아이는 건강해 보이는 모든 것을 일단 거부부터 하고 본다. 입맛도 까다롭고 새로운 음식은 시도하지 않는다. 그랬던 아이가 가끔은 자기가 딴 상추는 집어 먹는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이 건강해졌다.


스마트팜은 의외로 힐링 아이템이기도 하다.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스마트팜으로 가서 식물들을 보살핀다. 싹을 틔우고 마른 잎을 정리한다. 가드닝을 하는 남편을 보면 평화로워 보인다. 연구에 따르면 가드닝을 하는 사람은 스트레스와 불안도가 낮았다. 보살핌의 대상뿐 아니라 보살피는 행위를 하는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세상에 이런 것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이제는 더 이상 남편의 쇼핑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쇼핑이었다. 물건을 사서 써보며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덕분에 나 또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 중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살면서 아파트에서 텃밭도 길러본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남편 덕에 알게 되었다.


그에게 나의 세계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주방한켠 쌓여있는 각종 향신료, 뜨개질과 미싱에 빠져있을 때 잔뜩 구매 해 놓았던 털실과 천 조각들. 그동안 나의 취미 생활을 반대 한번없이 묵묵히 응원해준 그가 새삼 고맙다.


함께 살아보니 그가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도 신선하고 즐겁다. 무엇보다 우리 집 식탁이 건강해졌으니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오늘 내용을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


https://youtube.com/shorts/4upKOtCBb1A?si=mgzOkzXsDImBoQ-O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이 저를 계속 글 쓰게 합니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 작가 소개 : 닥터 키드니

내과 전문의 & 워킹맘이다. SNS에서 내과 의사의 건강한 잔소리 채널을 운영하며 건강에 대해 잔소리한다. 저서로는 에세이 <봉직 의사>가 있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doctorkidney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OZtZEv_llHWQ0jLpmhVV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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