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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Feb 08. 2024

우리가 달리기를 해야할 때

병원 편


    8시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 속 사람들이 경주를 시작한다. 손에는 색색의 가방을 들고 아이 이름을 적고 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늘의 달리기 실력을 확인한다. 휴, 이렇게 뛰었는데 10번 대의 대기 명단이라니. 아침의 분주함에 채찍을 더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몰려온다.

    빈 곳에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가 아이를 앉히지만 이내 허물 벗은 뱀처럼 스르르 미끄러진다. 여기저기 기침 소리가 난무하자, 아이의 마스크를 더 깊게 쪼여주고 절대 벗지 말라는 당부를 곁들인다. 잠시 내려갔던 엘리베이터는 이내 곧 미어터지는 내용물을 쏟아내고 몇 초 전의 내 모습을 복사해 붙여 넣기 한 사람들이 보인다. 앗싸, 내가 좀 빨랐다.



    대기 명단은 줄줄이 사탕처럼 끊어지지 않고 여기저기 아이 이름을 찾는 미어캣이 따로 없다.

"엄마, 몇 번째야?"

"엄마, 얼마나 남았어?"

"엄마, 나 심심해."

집에서부터 이어진 아이의 호출은 병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조금 있으면 된다, 이제 몇 번째다, 마스크 제대로 써라, 똑바로 앉아라. 몇 번의 훈계를 하다 보면, 한숨과 함께 나만의 세계 속 조용한 관찰이 시작된다.

    오전 시간은 특히, 복작거림과 동동거림이 혼탁하게 어울려져 있다. 밤새 열이 나 옆에서 보초선 엄마, 아빠는 겨우 세수한 몰골로 아이를 안고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끙끙 앓는 아이를 간호해 두 눈은 퀭하고 머리는 까치집이 있거나, 간신히 틀어 올렸거나, 정수리 냄새를 모자 속에 깊게 숨겼거나. 콧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는 이내 마스크가 젖어가고, 씌울 수도 그렇다고 벗길 수도 없이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꾸만 흐르는 게 속절없다.



    색색의 가방을 들고 경주를 하는 모습은 오후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끝나는 4시 이후, 병원은 병아리들의 기침과 콧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오전의 종알거림에 활기를 한 스푼 더한 모습이다. 눈치싸움에 실패한 엄마들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학원 시간을 체크해보지만, 간당간당한 시간에 이내 초조함이 몰려온다. 옆에 선 아이들은 "나 오늘 학원 안 가?"라며 누런 코를 흘리며 눈을 끔뻑끔뻑이지만 엄마의 마음은 며칠째 빠진 보강수업을 언제 다 채우나 계산하기에 바쁘다.

© unsplash


    야간진료 시간이 몇 분 안 남았다. 30분 전에 접수를 마감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에 구두 안에서 치이는 발가락 따위는 아픈 척도 못 한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한 뒤, 대기 명단을 보자 허탈함이 나온다. 상사의 눈치를 보며 내일의 나에게 업무를 맡겼건만, 오늘 저녁도 야식으로 미뤄야겠다. 아픈 아이를 기관에 보낸 것도 마음이 안 좋은데 아이의 아픔에 내가 더 처연해 보이는 건 모성애의 부족일까. 잠시 구두를 벗어 아픈 발가락을 해방해 보지만 꾹꾹 눌러진 손길에 위로가 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입원이라는 '선고'만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미 가벼워진 연차 주머니에 입원까지 더해지면 무슨 낙으로 회사 생활을 버티랴. 제발, 의사 선생님의 선량한 처방이 내려지길 간곡히 부탁해 본다.




    탕탕탕. 끝내 연차 소진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입원실의 다른 아이와 부모를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낸다. 헝클어진 머리, 무릎 나온 츄리닝, 슬리퍼를 끌며 표정 잃은 그녀를 보니 서로 거울을 보는 듯하다. 며칠간 지속된 아이의 아픔을 간호하느라 본인의 마음은 말라가는 식물 같다. 그래도 입원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까. 저출산이 대두되지만, 그 안에서 소아과 오픈런과 입원실 입성은 우리의 달리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병원에서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모습을 보며 작은 위로의 토닥임을 건넨다. 오늘 하루 너무 버거웠을 텐데 그 마음 안다고. 다들 그렇게 동동거리며 버티고 있다고. 엄마들은 일찍 병원에 다녀와 브런치 모임에 가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의사가 될 순 없었지만, 달리기 선수가 될 순 없었지만, 이것만은 그래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기에 오늘도 머리카락 동여매고 병원으로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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