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다 Feb 15. 2024

책 읽으러 30만원 씁니다.

미용실 편

    지갑과 에어팟, 충전기 그리고 책 한 권을 챙겨 나간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미용실을 예약한 주말, 책 읽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왜 하필 주말이냐 물으신다면, 평일에 홀로 아이 둘을 데리고 미용실에 가기도 힘들고 솔직히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가고 싶지 않다. 얼른 아이들 머리를 자르고 남편과 함께 귀가시키면 이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자고로 나에게 미용실은 머리를 변화시키는 곳이라기보단 마음을 다독이는 곳에 더 가깝다. 20대 시절, 기분이 나쁘면 미용실을 갔다. 마감 시간을 앞둔 미용실에 급히 연락해 시간이 되는지 묻고는 그날의 스트레스를 풀러 갔다. 대단한 변신은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상한 머리끝을 조금 다듬는다거나, 시간이 있다면 뿌리염색을 하거나, 그래도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면 세팅을 하곤 했다. 굳이 꼭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 머리를 만져주며 조용히 눈 감을 수 있는 곳, 미용실이 나에겐 스트레스 처방전이기도 했으니깐.




    머리를 매만지며 사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도 재밌었다. 사장님 댁 아이들이 커가는 얘기, 오가는 손님들의 가족사와 연애사, 잘생긴 청년의 입대 소식 등을 듣다 보면 2-3시간 앉아있어도 심심하기는커녕 허리조차 멀쩡했다. 결혼 10년 차, 육아 9년 차에 이른 지금은 3시간을 내리 앉아있는 그곳은 형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예약하는 이유는 나만의 세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가운을 걸치의자에 앉아 거울 앞에 책을 올리고 암묵적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읽을 테니 더 이상 시키지 말아 주세요.'


© unsplash

    

    자리를 옮겨 인고의 시간을 버텨야 하는 이 시점이 책 읽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염색약이 흘러내리지만 않는다면 에어팟도 가능하며 곧 그곳은 나의 해방구이자 탈출구가 된다. 모처럼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면 더 좋다. 미용실에 와서 사색하고 성찰해야 하는 독서는 조금 따분하고 진도 나가기도 어렵다. 이내 책을 덮고 못다 본 넷플릭스를 보기에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조금씩 아껴 읽고 있는 소설이 제격이다. 책을 읽으려 하니 고개가 자꾸 밑으로 떨어지고 그럴 때마다 기계에 매달려 있는 머리가 두피를 자극한다. 내 모습은 이내 메두사의 그것과 다름없으며 강제로 고개와 허리를 곧추세우고 책을 세워 정직한 독서 시간을 갖게 된다. 뭔가 좀 아쉽다 생각될 때쯤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커피나 티, 어떤 게 좋으세요?" 다정하게 커피와 함께 몇 개의 쿠키를 받아보면 이곳이 방구석 천국이다. 커피가 칵테일이라면, 눈앞이 바다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것으로 만족이다. 아무렴 어떠랴, 딸린 식구 없이 혼자 있는데.




    책장 넘기는 맛을 보다가 문득 눈앞에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깜짝이 아니라 무섭게 소스라친다. 선크림만 간신히 바르고 나온 생얼 속 잡티가 미용실 LED 조명 속 지분을 드러낸다. 지분이 너무 많아 '광역시' 수준이다. 광역시라기보단 해남 일대의 이름 모를 섬들의 향연이랄까. 적나라한 헤어라인까지 들여다보니 앞머리라도 내달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이라도 하고 나오는 건데. 결혼 전에는 화장 없이 나갈 생각도 못 했는데 뭘 믿고 겁 없이 미용실에 오면서 찍어 바를 생각조차 못 한 건지. 휴, 찍어 바르긴커녕 예약시간 맞춰나온 것도 용하디용한 일이 되어 버렸다. 초라한 모습을 보다 보니 이내 차림새로 눈이 간다.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운동화와 오늘따라 시커먼 운동화 끈이 눈에 들어와 다리를 오므려 본다. '아, 신발 사러 갔다가 항상 아이들 신발만 사고 나왔는데, 내 것도 좀 살걸....' 아니, 괜찮은 구두라도 신고 나올걸 그랬나 싶지만 미용실에서 구두 신고 있다가는 혈액순환 안된 종아리로 인해 발가락이 숨을 못 쉴 것이 뻔하다. 교양 없이 구두를 벗고 있을 순 없으니 그래도 운동화가 낫나. 뭐가 됐든 다음번에 번듯한 신발 좀 사야지 다짐하지만, 말하면서도 안다. 지켜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 unsplash


    머리가 얼추 됐다는 해방의 알람이 울리고 좁은 칸의 헹굼 실로 들어간다. 자동 의자에 몸을 깊숙이 눕히니 따뜻한 물과 함께 담요가 덮인다. '하아.. ' 목욕탕의 뜨거운 온탕에 첫발을 내딛다 온몸이 들어갔을 때의 깊은 탄식이 미용실에서도 흘러나온다.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이 가볍게 헹굼 되고 이내 두피 마사지가 시작되면 제발 이 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나른함이 몰려오며 두 눈이 살짝 감기고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때쯤 마법의 손가락 춤이 끝이 난다. '아 아쉽다, 아울렛 안 아이들 장난감 차처럼 동전 몇개를 더 넣어 시간이 연장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생각과 함께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간신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머리를 말리며 거울 속 모습을 바라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30만 원 치의 변화는 모르겠다. 컬이 잘 나왔다는 말도, 일부러 덜 말았다는 얘기도, 다음에는 전체적으로 염색을 하고 트리트먼트를 해야겠다는 얘기도 다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적당한 추임새와 표정을 보이고 30만 원의 효용을 생각해 보다가 씁쓸한 발걸음을 옮긴다. 이럴 바에는 제대로 외식 하던지 쇼핑이라도 할걸. 맘에 안 드는 머리를 애써 다시 만져보지만, 날아간 돈이 다시 들어와 메꿔질리 없다.


데리러 온 남편에게 물어본다.

"어때? 좀 별로지, 이상하지, 괜히 했나?"

".......괜찮은데?"


그의 대답에서 이미 느꼈다. 5초간의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전 04화 우리가 달리기를 해야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