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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07. 2024

커피숍에서 보는 심리테스트

카페 편

잠시 메뉴판을 둘러본다. 봄날을 맞아 분홍의 속삭임이 가득한 그곳에서 눈길을 돌리고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를 뒤로하기는, 갓 헤어진 연인의 연락처를 지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커피와 함께 고소한 우유와 농도가 치밀한 크림이 얹어진 커피는 순간의 위로가 쏟아질 것만 같은 그림이다. 이 한 모금을 마시면, 어젯밤의 고단함도, 오늘 아침의 번잡함도 모두 부드럽게 섞여 희미해질 것만 같다. 그런 살랑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첫 모금을 마시면, 역시 달콤 한도가 치사량이다.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과도 같은 설렘으로 마시기 시작한 커피지만, 비 오는 날 길가 하수구에 쌓인 꽃잎처럼 들러붙은 맛이 이내 올라오고 만다. 뭔가 개운치 않은 그 맛에 다음엔 꼭 아메리카노를 마셔야지 다짐하지만, 또 어느 설렘의 유혹에서 지게 될 지 나조차도 자신할 수 없다. 


© unsplash


    내 사치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은 커피숍이다. 커피값을 아끼겠다고 캡슐머신도 샀지만, 집에서 내려 먹는 커피와는 다른, 단정한 갈색의 공간에 들어가 남이 내려준 커피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그곳에서 구매하는 것은 커피와 함께 바로 온전한 내 시간이다. 흡사 "아메리카노 한 잔과 2시간 주문할게요."랄까. 아무래도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다시 파자마를 입으면, 나른함이 온몸을 도포한다. 기껏 박차고 나온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넷플릭스를 보고 싶고, 때론 온 집안 창문을 열고 이곳저곳을 뒤집고 싶다. 그러다 곧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이 되고, 심신이 지친 나는 이미 하루의 에너지를 소진한 채 방전되고 만다. 아이들에게 좀 더 다정한 엄마가 되려고 했던 다짐은 지나친 오버페이스의 마라토너처럼 중도에 하차하게 된다. 빨리 하루가 지나가 버렸으면. 얼른 잠자리에 들어 푹 쉬고 싶다는 생각만 더욱더 간절해질 뿐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서 최대 장점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에 대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이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나는 칸트 브랜드의 오리지날 클래식 초극세모 칫솔을 좋아하고, 덴티스트 플러스 화이트 치약의 개운함이 좋다. 셔츠를 낙낙하게 풀어 입는 스타일이 좋고, 대부분의 옷은 네이비 색상이다. 처음 살 때 값에 망설여지더라도 결국 원하는 제품을 사는 게 남는 장사다. 10년 가까이 입는 옷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만족감이 훨씬 큰 사람이다. 옷장은 조금 널널할 때 스트레스받지 않고, 쌓아두는 것보단 버리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한번 나갔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동선을 좋아하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 또는 하면 도움이 되는 일은 생각 없이 해버리고 마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개운한지, 그리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점은 무엇인지 안다면, 껌 종이에 버금가는 자잘한 스트레스를 많이 줄일 수 있다. 나는 마트에 가서 직접 장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담긴 물건을 보면 그 찝찝함이라는 세금까지 결제하게 됐다. 건강한 식재료가 담긴 카트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만, 가공식품의 비닐이 가득한 카트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줬다.

    반대로 온라인 장보기는 그 찝찝함이 시간 절약이라는 면에서 상쇄되고도 남는다. 같은 물건이라도, 온라인에서 가벼운 클릭으로 하는 결제는 금요일 밤의 유흥 같은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하니, 그 줏대가 갈대보다 더 하늘거림을 인정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보다 내가 편한 방법, 마음의 휴식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니 이런 요행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남이 뭐라던 간에, 결국 내 인생은 내가 한 선택과 결정으로 채워진다. 부드럽고 달콤한 시그니처 커피던, 아메리카노던, 우리가 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넘길 수 있는 나만의 용수철 같은 잣대로 보다 평온한 하루를 만들어 보자.

    나를 알아간다는 것. 그것은 내 한계를 인지하고, 딱 전까지 나를 몰아세우는, 그리고 무너지기 전에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안전끈과도 같다. 이전에는 알지 못한 구질구질한 사소함까지 알게 되면서, 선택해야 하는 고민의 시간이 줄어 간다. 이로써 조금 간결해지고 간편해진 삶에 만족하는 스스로를 때마다 내가 나에게 건넬 있는 위로의 순간도 쌓여가니, 외면과 내면간극이 좁혀진다. 

    내일 역시,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것이다. 어떤 속삭임의 유혹이 전해져도, 결국 최선의 선택임을, 후회 없는 선택임을 이미 알고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여기 적고 상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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