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6시다. 출장을 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운전 조심하라는 말의 꼬리표를 붙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 시간도 못자서 따뜻한 이불 속으로 자석처럼 붙는 나를 끌어내고 노트북을 켠다. 정수기의 뜨거운 물 버튼을 누르고 핑크색 머그에 반쯤 채운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보리 차를 추가한다. 10초가 지난 후 물을 솜처럼 쭈욱 빨아들이듯 마신다. 노트북의 비번을 눌러 몇시간 전에 퇴고하던 글을 멍하니 바라본다. 매거진을 발행하는 날이 화요일 아침 8시다. 발행시간이 한시간 반정도 남았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비문들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더 비틀어보고 세워보고 거꾸로 탈탈 털어본다.
아이들 등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마저도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날 수 있도록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 옆에 거실에 나와있는 아이들 핸드폰을 놓아둔다. 뒤돌아 나오다가 다시 막내를 물끄러미 본다. 어느새 다리가 길쭉해졌다. 늘 내 무릎을 비집고 들어오던 마르고 작은 몸이 아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볼 순 없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 퇴고를 기다리는 글자들을 살핀다.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큰소리로 깨운다. 음식을 데우고 식탁을 차리고 보리 차를 각자 텀블러에 넣어준다. 다시 노트북의 글자를 살핀다. 긴장하고 있는 어색한 글자를 백스페이스로 지우고 다른 자음과 모음을 불러온다. 아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을 먹는 동안 알람이 울린다. 7시 56분, 글을 발행해야 할 시간이다. 노트북 속의 글자들이 안심하는 눈치다. 전문을 둘러보지 못하고 발행한다.
큰아들의 사춘기와 만난 나의 갱년기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 이렇게 아침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아침만 바뀐 건 아니다. 글을 쓰는 모임으로 시작해서 브런치 작가라는 조그맣고 생소한 타이틀을 얻었다. 또 모임에서 깊이 있게 책을 읽다가 독서토론 리더과정이라는 도전으로 이어졌다. 무려 22강을 마치고 심화과정 5강까지 마친 상태다. 어제도 토론 논제를 만드느라 두세 시간의 잠을 반납했다. 오늘은 수료한 과정의 후속 모임 첫날이다. 모든 진행과정을 배운 대로 작성해서 문서화하고 다른 분들이 만드신 논제들을 취합했다. 첫날인데 두 시간 반을 통째로 내가 끌고 가야 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물으며 근원까지 뒤흔들던 나의 통증은 사라졌다. 솔직히 지금 흔들리고 아파할 시간도 없다. 그렇게 부르르 화산이 터져 오르는 듯했던 큰아이의 성장통도 멈춘듯하다. 고교 진학이라는 당면 과제로 긴장하며 진지한 고민과 태도를 갖춰가고 있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이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시니 나도 매일 놀란다. 이 바쁜 와중에도 외롭다고 고백한 남편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부부모임 여행으로 드라이브도 하고 모닥불 불멍도 하고 왔다. 덕분에 더욱 시간에 쪼들리고 있다. 난 엄마이며 아내이고 글 쓰는 베카이면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큰며느리다. 바로 내일이 그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지켜 내야 하는 아버님 제삿날이다. 부캐는 본캐와 시간을 쪼개며 서로 극심한 눈치싸움을 한다.
지치지 않고 모두를 병행할 수 있을까? 의심할 시간에 이렇게 부캐 작업에 몰두하며 마지막 매거진 글을 쓴다. 삶은 어디로 가 닿을 것인가. 큰 바람이 몰아칠 때 서둘러 올린 돛이 끝을 알 수 없는 망망 대해로 나아가게 한다. 어디로 가서 닻을 내릴 것인가. 미래는 알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모두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 낼 수 없기에 절망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중략)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게 될 터다.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p.304)
나는 수렁 같은 절망을 알아챘고 더 절망했으며 글로, 책으로 새로운 바람을 맞아 방향을 바꿨다. 아프지 않았다면, 알아차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큰아들은 자라고 팬데믹은 모습을 바꿨다. 묵직한 남편의 갱년기도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다. 아직 엄마 볼에 뽀뽀를 퍼붓는 열두 살 막내는 복병이다. 부글부글 마그마를 키워가는 화산 같은 존재다. 그래도 나의 갱년기는 두 번째 사춘기에 맞설 힘을 키워가고 있다. 올 테면 와봐라. 단단한 갑옷을 입고 두툼한 방패를 들고 대비하고 있다. 쓰나미처럼 나를 휩쓸어주길 은근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