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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Oct 25. 2022

순수한 자기 사랑이 놓여있다

사춘기와 갱년기의 조우(5)




내게 쏟아진 자유는 소나기였을 뿐 비는 그치고 답답한 생활은 반복되었다. 코로나는 느슨해졌지만 확진자는 오히려 늘어갔다. 사춘기 소년의 눈물은 멈췄지만 그의 방문이 굳게 닫혔다. 팬데믹 3년이 지나는 동안 10살이었던 막내는 키가 엄마만큼 자란 열두 살이 되었다. 그 녀석의 자아도 꿈틀거리고 있다.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차례로 살아가는 것일 뿐, 그 속에서 글을 발행하는 엔터키를 누르는 작업 계속되었다. 엔터를 누르기 전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은 내 머리 위로 자유를 붓고 있는 느낌이다. 어느 날은 10분으로 끝나고 어느 날엔 세 시간씩 이어진다. 운이 좋다면.


갱년기라는 어색한 단어도 인생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나의 50대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을  모호한 글자는 지금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바닥까지 가라앉힌다.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사이클을 만들기도 한다. 내 안의 호르몬은 예민하게 작용한다. 남자들의 재채기 같은 생활소음이 귀에 거슬린다. 꽉 닫힌 방문 넘어 인터넷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한 존재도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의 공간인 식탁의자에 앉아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릴 때, 뒤로 큰아이의 방문이 보인다. 모니터를 보고 있는 동시에 그 문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는 괴로움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시간에도, 책을 읽으며 메모를 남기는 순간에도 눈에 들어오는 방문의 크기만큼 머릿속이 산만하다. 문이 의식되는 순간 집중은 끝난다.


그래서 집에 있다가도 큰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선다.

"다녀왔습니다."

아이는 랩처럼 인사를 중얼거 손을 대충 씻는다. 배고픈 열여섯 남학생은 냉장고 문을 열고 두리번거린다. 간식을 주겠노라고 하면 두유를 한 팩 들고 돌아선다. 아이 뒤통수에 묻는다.

"학교에서 별일은 없었니?"

 "네!"

대답이 점점 작아지며 방문이 닫힌다. 귤이 가득 담긴 락앤락 글라스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샌드위치와 함께 트레이에 담는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속으로 센다.

'하나, 둘, 셋!'

아이가 문을 열려고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열리기 전에 문을 연다. 아이의 왼손에 핸드폰이 들려있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다. 사식처럼 간식을 넣어준다.


그러는 사이 심란해져 툭 떨어진 불편한 심기를 꾹 누른다. 낼모레가 시험이다. 저 아이에게도 계획이 있겠지. 트레이닝 바지를 주섬주섬 입는다. 일부러 거실 한쪽에 내 운동복을 쌓아두었다. 그 옷들이 언제 거실로 나오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거의 매일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 인듯하다. 집중이 안될 때 어느때든 빠르게 나가야 했다. 후드의 지퍼를 올리고 마스크를 쓰는 동시에 발목을 휘휘 돌려준다. 준비 운동이 부족해 근육이 뭉친 적이 있었다. 산에 주저앉아 30분을 울었던 이후에 생긴 버릇이다. 계속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면서 운동을 하는 동시에 식탁 위 독서대에 있는 책을 슬링백에 넣는다. 아무 말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집에 누가 있건 내게 행선지를 묻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세로 허벅지와 다리 근육도 꾹꾹 자극을 준다. 다행히 7층에서 열린 엘베 안에 사람이 없다. 반대 다리로  자세를 바꾼다. 문득 머리 위 구석에 있는  까만 카메라가 보인다. 경비실을 지나다닐 때 안에 주르륵 있던 CCTV 안에 투실 작은 아줌마가 엉성한 자세로 몸을 푼다. 그게 나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끄기로 한다. 7층은 짧다.


초입에 들어서면 환한 바깥세상보다 두 톤쯤 낮은 조도속에서 숲의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코로 훅 들어온다. 귀를 청량하게 만드는 새소리도 함께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무 사이로 난 돌길을 지나 데크로 올라서는 순간 딩동 소리가 울린다. 들어서는 사람을 센서로 인식하고 안내하는 음성이 들린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조금은 더 빠르게 보폭을 늘리고 오른다.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며 발 뒤꿈치에 자극을 느낀다. 보폭을 한껏 늘려 다시 런지와 비슷한 자세로 천천히 데크길을 걸으며 더 근육을 풀어준다. 핸드폰 속의 스톱워치 시작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슬링 안에서 책을 꺼낸다. 펼친 책 속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딸 루시를 설득한다.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자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대꾸한다.

"저는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살 수는 없어요.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아버지일 수 없듯이 말이에요."

스물다섯의 딸은 아버지 말을 더 이상 듣지 앉는다. 아니 그녀는 열여섯 일 때부터 그렇지 않았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이 뜸한 데크길 위에 나뭇잎의 그림자와 햇볕이 촘촘히 흩어져있다. 책을 손에 들고 가볍게 뛴다. 되도록 허리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타닥타닥 가볍게 뛰다가 숨이 차오를 때 멈춰 선다. 다시 걷는다. 걷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분주하지만 맑은 피톤치드가 그 상념 사이사이를 채운다.


루소의 철학은 다음 네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적 선함'을 믿었다. 자신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노동도 언어도 없이, 거처도 바라는 것도 의사소통도 없이, 타인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해치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숲 속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한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p.89.91


중간고사를 앞둔 아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 데크길 위에 흩뿌려진 햇볕처럼 '자기 사랑' 놓여있다. 이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글로 맞는 자유의 소나기와 다른 상쾌함이 여기 있었다. 책을 손에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갇힌 마음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가을 하늘의 투명함에 환하게 밝아진다. 누구에게도 나의 욕구를 투영시키고 싶지 않다. 이 순간만큼은 바라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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