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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Oct 18. 2022

마침내 엔터를 누르다

사춘기와 갱년기의 조우 (4)



내 시간을 꾸려가며 글쓰를 처음 시작했다. 그 행위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구청에서 신청한  두 수업은 제목이 비슷해 보였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에세이 쓰기>다. 희끗한 머리에, 느리고 중저음의 음성을 가진 할아버지 강사님이 맞춤법 강의를 하셨다. 유익하다고 해도 매주 반복되니 고등학교 국어시간 같이 지루했다. 게다가 그분은 에세이 쓰기와 관련이 없는 답사 사진을 계속 공유했고, 한 참여자는 엉뚱한 질문을 공격적으로 했다.

"강사님, 지난주에 보여주셨던 마지막 사진은 어디죠?"

"무슨 사진인지 모르겠네요."

"지난주에도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하셨어요. 모르신다고요? 이해가 안 되네요."

"......"

강의는 산으로 갔고 수업시간이 불. 개인 카톡으로 짧게 글을 써서 보내는 과제가 있었지만 선택이었다. 글을 제출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나도 한번 용기 내어 보냈지만 피드백도 맞춤법 위주 거나 거의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 시간에 다른 약속을 잡고 참여하지 않았다.


목요일 수업의 최대의 장점은 다른 강의가 상대적인 비교 대상이 되었다는 이다. 지루하고 루즈한 그 강의해 화요일 <내 삶, 나만의 글쓰기> 수업은 타이트했다. 강사님은 보이는 글을 쓰는 근본적인 이유와 방법으로 의를 시작했다. 차츰 블로그와 브런치를 글쓰기로 활용하는 법을 들으며 오랫동안 방치했던 블로그도 살렸다. 매주 네이버 카페에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썼다. 거의 모두가 참여했다. 글이 쌓여갔다.


키케로는 궁수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궁수는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궤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숨을 내쉰다. 스토아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p.408~409


나는 노트북의 엔터 키를 누르며 활시위를 당겼다. 그 활은 의지와 상관없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인 에릭 와이너의 얘기처럼 최선인지, 진실지 알지 못한 채 매주 빠짐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글을 올렸다. 4주 과정이  끝난 후  같은 강사님의 <오감을 자극하는 글쓰기>를 신청하고 계속 글을 썼다. 내 활시위를 떠나 던져진 글을 타인들과 마주하고 바라보 낭독했다.


수업시간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피드백 참여했고 내 글도 합평을 받았다. 베카라는 닉네임이 불려지면 등줄기에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열다섯 중학생처럼 다리를 쉴 새 없이 덜덜덜 떨었다. 오징어 체험이랄까? 온 팔다리가 비비 꼬이고 부끄러움에 아파트 7층부터 지하층까지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엔터를 누르는 순간의 짜릿함과는 또 달랐다. 합평 시간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긍정적인 피드백이어서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살았다. 육아와 살림의 테두리 안에 꽁꽁 묶여 있었다. 답답하고 암울한 감정이 갱년기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을  비로소 마주한 것은 글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감정의 폭풍 글로 풀어내면서 정서적 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내 영혼이 탈출을 시도했다.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처럼 꽉 막힌 벽을 조금씩 뚫었다. 마침내 은 공간이 나타났다.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팔을 벌렸다. 내 얼굴 위 소나기가 마음껏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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