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를 꿈꾸는 그대에게, 일곱번째 이야기
지난 8월에는 7급 국가공무원 채용 필기시험이 있었다. 4월에 실시한 9급 시험에도 감독관으로 동원되었는데 이번 7급 시험에도 당첨되었다. 이런 당첨은 하나도 반갑지가 않다.
지난 9급 시험 때에는 나이가 많은 수험생도 더러 눈에 띄었는데 7급 시험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9급 시험은 5과목이어서 나이 많은 수험생도 한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7급 시험은 7과목이나 되기 때문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도전하기엔 버겁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난 9급 시험 때에는 100분 내내 서있어서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의자에 앉아 있어도 된다고 해서 빈자리 의자를 앞에 놓고 두시간여 동안 앉아 있었다. 초집중 상태로 문제를 풀고 있는 수험생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해보았다.
안정적인 직업이니까?
정년까지 다닐 수 있어서?
퇴직 후에는 공무원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남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좋은 직업이라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좀 슬프다. 세월이 지나고 호봉이 오르면 형편이 좀 나아지긴 하지만 9급으로 갓 입사한 직원은 월급이 진짜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정년까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여 총액은 다른 사람들이 일생동안 받는 봉급 전체 금액과 비슷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 안되는 월급을 벌기 위해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60세까지 참고 해야 한다면 너무 괴롭지 않을까. 공무원이 되겠다고 마음 먹고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공무원이 자기 적성에 맞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힘들게 공부해서 겨우 공무원이 됐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못해먹겠다 싶으면 정말 난감하지 않겠는가.
□ 대민 면역력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으니 세금을 할 수 없이 낸다. 이유없이 빼앗기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세금과 관련된 민원은 드셀 수밖에 없다.
"왜 이 고지서가 날라왔나?"
"세금을 일부로 안낸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못냈는데 왜 압류를 했나?"
"빨리 사업자등록을 내서 사업을 해야 하는데 왜 사업자등록을 안내주나?"
"근로장려금을 신청했는데 왜 안나오나?"
여러 종류의 전화가 오고, 민원인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조목조목 설명해주면 알아듣고 수긍하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욕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딱봐도 명의 위장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부터 말 안통하는 영감님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정말 다양한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그것도 억울하게 자기 돈을 빼앗겼다고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을 말이다.
직렬마다 차이는 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국민을 상대하는 서비스 직업이다. 세상에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직업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거래처 사람 몇 명을 만나는 것과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의 강도가 다르다. 수줍음이 많거나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그래도 굳이 해야겠다면 고객을 상대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민 면역력을 키우기를 바란다.
나의 경우는 세무공무원이 되기 전에 백화점에서 명절 갈비세트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2주 남짓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양한 고객들을 응대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요령이 생겼고 백화점에서 강조하는 친절한 말투와 표정을 몸에 익힐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세무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했던 건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들이 지금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면서 아무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다 해보자.
□ 공감력
억울하게 세금을 두들겨 맞았다(?)고 큰소리를 치며 민원인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제발 내 민원인은 아니기를. 그러나 머피의 법칙처럼 그런 민원인은 절대 나를 비켜가지 않는다. 내가 그분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고지서를 보낸 것도 아니고 전산으로 확인된 자료에 의해 세법에 따라 규정대로 처리한 것 뿐인데. 어쩌라구?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말했다가는 십중팔구 큰소리가 오가고 서장 나오라며 서장실로 뛰어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쉽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보다 저런 민원인 한명이 유발하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8년 반쯤 되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요령은 '상대방 입장에서 잘 들어주기'이다. 터무니없는 소리가 됐든 억지가 됐든 일단 민원인이 하는 이야기는 눈을 바라보면서 잘 듣는다. 나를 괴롭히러 온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이웃집 아저씨, 단골 미용실 원장님, 동아리 선배님, 삼촌 등등 내 지인이라고 생각하고 듣는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공감하면서 들어주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흥분해서 시작했던 얘기도 어느덧 진정이 되고 민원인도 화가 누그러진다. 그분들도 안다.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는 걸. 어쩔 수 없다는 걸.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뛰어오는 거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어서 내가 그분들 편에서 생각하고 뭔가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걸 그분들도 느끼면 대개는 원만하게 상황이 종료된다.
물론 '대개는' 이다. 말이 안통해서 몇 시간씩 진상을 부리다가 퇴근시간 넘어서야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업용 해머를 들고 와서 세무서 현관 유리를 박살내서 파출소에 끌려간 민원인도 있었다. (목숨걸고 일하는 세무공무원도 위험 수당이 필요하다.)
□까까정신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까까정신'을 아실 듯하다. 까라면 까는 정신을 말하는데 조직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자질이지만 국세청에서는 더더욱 강조되는 자질이다. 우리 과, 우리 서를 위해서는 무리한 지시에도 군말없이 따라야하고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종종 불합리한 일도 그냥 해야할 때가 있다.
실적에 목숨거는건 민간 기업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표적으로 체납 정리 실적으로 줄세우기를 들 수 있다. 세무서별로 과별로 인별로 체납 정리 실적을 뽑아 하위 관서는 과장님도 소환하고 종종 서장님까지 지방청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세우라고 닦달한다. 쪽팔리게 지방청에 다녀오신 관리자는 직원들을 달달 볶고 직원은 닥치는대로 압류했다가 체납자가 뛰어와서 난리를 치고 간다. 일년 중 특정 기간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연중 내내 수시로 발생한다는 점이 비극이다.
체납 뿐 아니라 각종 처리실적도 줄세우기의 대상이다. 물론 실적을 강요당하기 싫다면 민원실이나 업무지원팀에서 일하면 된다. 인사이동 때 원하는 과를 골라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인게 흠이라면 흠이다.
장관급 부처(예: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기획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토론하고 의견을 절충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에 우리에 비해서는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라고 들었다. (풍문으로 들었으니 아니라면 댓글 부탁합니다) 그에 비해 국세청은 집행 부처이기 때문에 세법대로 정해진 규정대로 일사분란하게 업무를 처리해야만 한다. 우리청이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실적으로 쪼아대는 민간기업이 힘들어서 공무원을 꿈꾸는 분이 계시다면 제발 세무직렬은 피하시기 바란다. 힘들게 공부해서 합격했는데 세무서에 발령받고 후회하시는 분들이 많다.
본인은 대민면역력과 까까정신을 갖춘 사람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국세공무원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 세법 지식이나 숫자 감각은 공부하면서 익히면 된다. 국세공무원은 퇴직할 때까지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운명이다. 세법이 고맙게도(ㅠㅠ) 매년 바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상당한 두께의 개정세법 책이 매년 발간될까.) 심지어 매년 100시간의 교육시간을 채워야 한다. 이또한 조직 성과 지표에 해당되서 아무리 바빠도 집합교육을 다녀오든 사이버교육을 받든 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직업은 없다. 남들이 입을 모아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는 공무원에게도 이런 고충이 있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무공무원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도전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는 멋진 '대한민국 국세공무원'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