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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태영 Oct 23. 2024

7-1 딸의 10년 비밀 연애

아빠에게 보내는 일곱 번째 답장

아빠! 지난 편지도 잘 받았어. 아빠의 하루 중 행복 찾기에 대한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빠도, 나도 여유를 즐길 새 없이 살았던 것 같아.


처음 서울에 올라갔을 때만 해도 일부러 금요일, 월요일 공강을 만들어 놓고는 목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 마자 상주에 내려갔다가 월요일 첫 수업에 맞춰 서울로 올라갔지. 서울에서 별다른 일정이 없었고,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던 시기여서 더 편한 상주에 가고 싶었어. 주위에서는 이제 곧 서울이 익숙해지면 엄마, 아빠가 내려오라고 해도 안 내려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 말 처럼 한 달에 두 번이면 많이 내려가는 때가 오더라. 1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 부터 대외활동을 시작했고, 방학 때도 서울에 왔다갔다 해야할 만큼 바빠졌어. 


지금 생각해보면 1학년 부터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나 싶어. 난 고등학생 때부터 'PD'란 직업을 너무 하고 싶어서 '영상 제작'이라는 문구만 보이면 지원 버튼을 누를만큼 스펙을 쌓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거든. 친구들이 클럽에 놀러가자고 그래도 대외활동 과제 해야한다고 기숙사에 남아있고, 주말에도 카페에 가서 잘 하지도 못하는데도 책을 따라 꾸역꾸역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을 했어. 촬영에 '촬' 자도 잘 모르던 때에도 무작정 무거운 카메라를 이고 지고 다니면서 이런 저런 영상을 만들었지.


사실 고백하자면, 지금의 아빠 사위를 만나던 첫 소개팅 날도 촬영을 끝내고 허겁지겁 서울로 돌아와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었어. 오빠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고, 제발 꾸미지 않고 나와달라고 했었지. 하루 종일 야외 촬영이라 예쁜 옷을 입을 수도 없었거든. 그랬더니 정말 오빠는 모자에 후드티를 입고 나왔더라! 그 때 딱 알아봤던 게 정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싶었어ㅎㅎ


아빠가 엄마한테 그랬었다며.


 우리 딸은 정말 남자에 관심 없고, 일만 해서 걱정이야.


근 10년 가까이를 아빠에게 말하지 않고, 남자친구를 사겼던 건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아빠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걱정할까 싶어서였어. 아마 엄청 걱정하지 않았을까? (지나가는 말로 아빠가 내 자취방에 유선 전화기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더 말하기를 주저하게 됐던 것 같아ㅎㅎㅎ) 지금의 남편을 만난지 10년 째가 되던 해에 난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드디어 아빠에게 말하기로 결심을 했어. 주위 친구들은 아빠가 뒷 목 잡고 쓰러지면 어쩌냐고 더 걱정을 해주는거야. 사실 나도 진짜 많이 걱정을 했거든? 배신감을 느낄까봐! 그런데 아빠는 내가 스윽 꺼낸 남자친구 이야기에 "얼굴 한번 봐봐"라는 한 마디를 하고는 내가 선별해 둔 사진을 주의깊게 봤어. 얼마나 심장 떨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땀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인상을 중시하는 아빠에게 오빠는 한 번에 통과되었고, 그 다음주부터 "상주에 언제 같이 내려올거야?"라는 말을 내가 전화할 때마다 하는거야. 그렇게 한 달만에 상주로 내려가 인사드리고, 그 다음주에는 어머님, 아버님 인사를 드리고, 바로 결혼식장을 잡았지. 말도 안되게 빠른 속도로 10년 비밀 연애는 막을 내리고, 결혼 준비에 들어갈 수 있었어.


아빠가 처음으로 남자친구에게 보낸 문자를 미리 써본 손글씨


오빠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해. 첫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어떤 회사'를 다니는지, '연봉'은 얼마를 받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모아놓은 돈'은 얼마나 있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아버님은 그 중 하나도 안 물어보셨다고. 그냥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시종일관 아빠가 살아가는 이야기만 하면서 오래전에 봐왔던 사람마냥 대화를 했던 것 같아. 사위 면접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지.


난 정말 이때 더 느낄 수 있었어. 아빠가 나를 그만큼 믿어주는구나! 내가 10년이나 만난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거라는 아빠의 말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도 궁금하긴 해! 내가 처음으로 아빠한테 "남자친구 있어!" 라고 말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빠도 바쁜 생활을 하느라 서울에 살던 나를 많이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했다는 지난 10년의 시간. 지금 내 옆을 든든하게 사랑으로 지켜주는 오빠 덕분에 그 시간들도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대학생 시절에는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야근을 하면 안 자고 기다렸다가 내가 집에 들어가는 동안 전화통화로 지켜주기도 했거든. 아직 아빠에게 말하지 않은 수많은 데이트들과 이야기들이 있는데, 나중에 궁금하면 더 해줄게! 

아빠는 처음 볼 우리의 두번째 데이트 날 찍은 사진

아직도 결혼식에 왔던 내 주위 사람들은 다른 건 기억 안나고 아빠의 축사만 기억에 남는대. 사위 이름으로 삼행시 했던 거. 


최 : 최고다

진 : 진국이다

혁 : 혁아 사랑해


때론 걱정이 너무 많아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보일때도 있는 아빠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빠는 항상 유머를 잃지 않았잖아. 지난 시간은 아빠와 나 둘 다 앞만 보고 바쁘게 살았던 만큼, 이젠 여행도 하고 여유도 즐기면서 서로 행복한 이야기 많이 많이 공유하자! 앞으로도 우리 앞에 펼쳐질 모든 날들이 얼마나 더 행복할지 기대가 돼. 


그리고 이 편지를 빌려 이 말을 꼭 하고 싶어.

10년동안 숨겨둔 남자친구를 공개했을 때 뒷 목 잡고 화내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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