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 아이의 책가방에서 숙제를 넣어오는 종이 파일을 살피다가 A4용지 반만 한 크기의 숫자 쓰기 노트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휘리릭 넘겨보니, 꾹꾹 눌러쓴 연필 자국이 숫자 5까지 머물러 있었다.
유치원에서도 숫자 10까지 읽고 쓸 수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큰 언니 오빠가 있는 아이들은 훨씬 큰 숫자들도 거침없이 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몇몇은 간단한 덧셈과 뺄셈이 가능했다. 그런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 다시 숫자 1부터 차근차근 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한 부분이었다. 겨우 1부터 5까지 쓰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트에는 한 페이지당 숫자가 하나씩 적혀있었고, 크게 따라 쓰기 한번, 조금 더 작게 따라 쓰기 열 번, 콩알만 한 크기로 따라 쓰기 60번을 하면 한 숫자에 대한 쓰기 연습이 끝나는 식이었다.
" 엄마, 나 5까지 쓰는 거 연습했어. "
어느새 나타난 아이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 그러네. 엄마가 다 봤지. 5까지 썼네? "
" 응. 이제 다음엔 6 쓸 차례야. "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 근데, 이거 너무 지겹지 않았어? 다 아는 건데. "
아이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 아니, 이거 어려워. 3이랑 4랑 5 쓰는 게 얼마나 헷갈리는데. 아직도 조금 헷갈려. "
아차 싶었다. 먼저는 머리로 아는 것과 쓰는 방법을 아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나아가 독일 교육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선행 학습은 안됩니다.
아이 담임 선생님의 당부였다. 독일인 부모들도 집에서는 아이에게 함부로(?) 독일어를 알려주거나 고쳐주지 말라는 식이었다. 학교에서 도입한 교육 시스템을 철저히 믿고 따라 달라고 했다. 부모의 스타일대로 가르치지도 말고, 고쳐주지도 말고 혹은 앞서 나가지도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숙제를 잘하고 있는지 체크하고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는 독일어뿐 아니라 모든 과목에 해당됐다. 나는 어차피 독일어 교육엔 개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아이의 교육을 온전히 학교에 맡긴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최근 인상 깊게 본 드라마가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로 막을 내린 드라마이다. 그중 9화 에피소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한 여자 아이가 밤 9시가 다 돼서 패스트푸드점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 아이는 한 손엔 햄버거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극 중 아이의 나이는 초등학교 3학년, 즉 만 9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였다. 카메라는 잠시 동안, 아이가 풀고 있는 수학 문제집 한 페이지를 자세히 비춰주었는데, 화면에 나오는 수학 문제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다루는 삼차방정식이었다. 고작 만 9세 아이가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 문제를 푼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유난히 수학이라는 과목에서 선행학습이 참 많이 이루어진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과정을 먼저 공부하고, 중학교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수학의 정석'을 미리 공부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그 이후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이젠 선행 학습의 정도도 더 빨라졌겠구나 싶어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이의 숙제가 담겨있는 종이 파일 안에는 또 다른 종이가 들어있었다. 수학 시간에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학습지였다. 그중 한 페이지에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숫자까지 마음대로 써본 듯한 흔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3과 5와 9 같은 숫자들이 좌우 방향이 뒤집힌 채로 쓰여있었다. 이렇게 잘못 쓰인 숫자들은 선생님이 표시한 빨간 동그라미 안에 갇혀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고작 만 6세 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숫자의 방향들이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인지했다. 너무 쉬워서 아이에겐 유치할 거라 생각했던 숫자 쓰기 연습은 결코 시시하거나 넘겨버릴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너무나 당연하게 써 내려갈 3, 4, 5라는 숫자들이 지금 아이에게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 속에서 나는 얼마만큼 기초를 탄탄하게 쌓아 왔었는가?
보통의 지능과 보통의 능력을 가지고 남들보다 드러나지도, 혹은 그렇게 뒤처지지도 않게 그럭저럭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누군가들처럼 살아내기 위해서 사실은 내가 놓치고 건너뛰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나의 학창 시절은 경쟁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모두들 다른 누구보다 더 먼저 지식을 습득하고 빨리 달려갈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생각할 틈도, 힘도 없었다. 나의 수준과 상황에 전혀 맞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들을 억지로 소화시켜내야만 했다.
이가 없는 어린 아기는 모유나 분유밖에 먹을 수 없지만 신체의 발달에 따라 차츰 부드러운 음식을 씹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모든 음식을 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와 같이 배움에 있어서도 적정 시기가 존재한다. 지능이 너무 뛰어나, 나이와 상관없이 어려운 개념과 지식들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몇 명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장 배워야 할 것을 내버려 두고 더 대단하고 어려운 것을 먼저 습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겠는가? 이것은 마치 이가 없는 아기에게 질긴 고기를 씹어 삼켜보라고 채근하는 것과 같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게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무엇이든 적정 시기보다 조금씩 앞서 배워 나가는 것이 마치 똑똑한 사람인 양 살았더니, 결국 진짜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도, 무작정 외운 공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초는 없어도 시험 문제를 푸는데 응용할 능력과 눈에 보이는 점수만 있으면 됐다. 반대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다 할지라도 빠른 시간 내에 문제를 풀 요령이 없다면 낙오자로 찍히기 일쑤였다.
학벌은 높아지고 커리어는 쌓여도 그 안에 단단한 알맹이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전문성을 드러내야 할 순간이 오면 혹여나 나의 구멍을 들킬까 가슴 졸였던 기억도 있다.
남편을 따라 생각지도 못한 독일 살이가 시작되었을 때도 이는 매한가지였다. 독일어를 겨우 몇 개월 배워놓고, 독일 살이 10년 차 대학생의 실력과 비교하며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보다 어렵고 고급스러운 독일어 표현들을 익혀야 한다는 욕심에, 견고하게 쌓았어야 했을 문법의 기초들을 놓치는 우를 범했다. 그런데 독일에서 살면서 더욱 지독히 느끼는 것은, 결국 독일어의 실력이 드러나는 지점이 기초 문법이라는 사실이다. 쉽다고 우습게 보고 대충 넘길 일이 절대 아니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적절한 배움의 시기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결혼 생활, 집안일, 아이를 키우는 일 심지어 독일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다른 이들과 서로 알아가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까지도 그러했다. 기초를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채, 다음 단계로 빨리빨리 넘어가다 보면 부작용이 생기기 일쑤였다. 시간은 흘렀으나 견고해지기는 커녕 위태로운 위기와 갈등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결국 그 문제의 해결점은 대부분 '기초'에 있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곳에 말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
베를린에 사는 손녀가 독일 초등학교에 다닌 다고 하니,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우고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수학 시간에 숫자 쓰기 연습을 하고 있고 최근에 숫자 5까지 쓰기 연습을 마쳤다는 것을 알려드렸다. 학교 입학한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아직도 숫자 5를 쓰고 있다는 소식에 부모님 모두 박장대소를 하셨다. 그러고선 한국에서 초등학생 1학년이면 간단한 덧셈, 뺄셈도 다 하고 구구단도 다 뗀다더라, 수학 학원 보낼 데는 없냐, 집에서라도 미리 좀 가르쳐줘라 는 등의 걱정 어린 조언을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꽤나 자신 있게 대답했다.
" 그거 아세요? 3, 4, 5 쓰는 거 진짜 헷갈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