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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소 아이

교대역 11번 출구

by 이음


오전 9시 30분, 법정으로 향하는 계단 위.
검정 패딩을 입은 한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긴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손톱은 물어뜯겨 있었다. 함께 나온 여성 보호관찰관이 말했다.

“재판 시작하니까 들어가자. 끝나고 뭐 먹고 싶은 거 말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건>
사건은 작년 겨울, 전북의 한 청소년 보호센터에서 시작됐다.
15세 여자아이가 시설 안에서 관리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폭행은 반복적이었고.
욕설, 밀치기, 밤중의 벌서기, 남자 관리자 혼자 아이들 방에 들어오던 일까지.
CCTV가 없는 무법지대였다.
일주일간 아이는 두드려 맞다가, 몰래 쓴 쪽지를 친구 가방에 넣었다.

그 쪽지는 서울로 옮겨간 친구의 상담 치료 중 서울청소년상담센터 직원에게 발견되었다. 직원은 그 편지를 들고 관할 지자체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했다.

하지만 고발까지는 반년이 넘게 걸렸다.
담당 공무원은 말했다.
“관리자들이 아이들 말 듣고 뭔 일 제대로 하겠어요?”

그 말이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다.
센터 내 다른 아이들이 차례로 증언을 하였다.
“하루에 열 대는 맞았어요.”
“남자 관리자가 밤마다 여학생 방에 왔었고요.”
“무서워서 자해한 애도 있었어요.”
“병원 보내달라니까, 거짓말이라며 벌로 청소나 시켰어요.”


<재판>
피고는 ‘정상적인 통제였고, 거짓 과장이 많다’며 부인했다.
변호인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했다. 하지만 판사는 아이들에게 차분히 물었다.

“그날 왜 참았니?”

“말하면 더 맞을까 봐요.”

“병원에는 왜 안 갔어?”

“가고 싶었는데, 감금당했어요.”

“그럼,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니?”

“죽어도 안 믿어줄 거라고요…”

법정엔 조용한 숨소리만 가득했다.
결국 관리자는 실형을 받았다.
초범이었지만, 반복성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점이 고려됐다.


“취약계층 청소년의 생명권과 인권은 국가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한다.”
판사의 마지막 말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웃지 않았다.
판결문이 내려지는 동안,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뜯고 있었다.
이겨도 기쁘지 않은 싸움이었고,
그것은 늦게 도착한 정의였다.

재판이 끝난 후, 소녀는 교대역 11번 출구 앞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다른 애들도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해.”
“나 같은 애 또 안 생기게.”

한 줄, 두 줄.
소녀는 메모장에 또박또박 쓴다.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자기 손으로 적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누가 묻지 않아도 쓰기로 했다.

<출구>
이곳은 교대역 11번 출구.
누군가는 말문을 닫고,
누군가는 말문을 연다.
그리고 그 말은,
이곳에서 진실이 되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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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