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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Sep 10. 2021

품위 있는 그녀


미술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딸이 수업 때 그렸다는 그림은 유행 짤 같다. 소녀 설레고 있는데 난데없이 강아지 똥 좀 버려주세요, 라는 소년 아 뭐냐고. 학원에서 원생 개개인의 이름으로 밴드를 만들어 수업 사진과 그림을 올려주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집중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하나씩 포개어지는 그림을 보며 아이의 성장을 간접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신선하달까. 어제는 자기가 말끔하게 닦은 샌들을 신고 가면서 미술 선생님한테 자랑해야지, 했다. 아니 다닌 지 일주일밖에 안됐는데 선생님한테 그런 말도 하니? 내가 묻자, 으잉? 나 벌써 선생님하고 친한데?라고 했다. 아, 푼수끼 있는 이 명랑함.


딸과 받아쓰기를 같이 한다. 애가 귀찮아해서 의지를 북돋을 요량으로. 누가 덜 틀렸나 하는 것은 내기지만 어떠한 보상도 없는 내기인데, 어린이라서 그런지 지는 걸 그렇게나 배 아파한다. 어떨 땐 상황 봐서 일부러 틀려주기도 하는데 어제는 내가 먼저 풀어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문제가 틀렸고, 이제 딸의 차례였는데 보아하니 띄어쓰기가 두 군데 틀린 거라. 채점은 각자 본인이 직접 하기 때문에, 나는 어찌 하나 보려고 모른 척 딴짓을 해 봤다. 백 점을 노린 딸은 자신감 뿜뿜 돼서는 '오늘 이기겠는데?' 흥분하더니 틀린 답에 선 하나 찍 그으면서 90점 동점 가나요? 하며 설레발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10번 답에서 띄어쓰기 오류 발견. 모올래 나를 흘깃 보더라. 그리곤 단어 사이에 쬐그맣게 띄움 표시를 해놓고 맞았다고 동그라미. 찔렸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거 띌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아 다행이다.'


오후에는 에어컨 청소하러 두 분이 오셨다. 매일 덥지만 어제도 참 드럽게 더웠기에 청소 끝마치는 동안 딸의 방에서 삐대느라 괴로웠다. 와중에 목마르다며 딸이 물을 가져왔는데 그러면서 '저 아저씨들한테도 차가운 물 드릴까?'라고 하는 거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애 맘이 이뻤다. 화색 도는 말투로 '와 고마워'라고 응답해준 그들에게도 감동했고. 이 무더위에 이런 청소라면 의욕이 뚝뚝 떨어질 텐데 참 친절한 서비스맨들.


저녁은 뭐 해 먹나. 매일의 최대 고민인데 딸이 콩나물냉국을 추천하길래, 늦은 오후 같이 사러 갔다. 마트에 도착하니 자기가 고르겠다며 엄마는 천천히 오랬다. 여러 개를 두고 고심하더니 가격이 제일 싼 콩나물을 고르길래, 그램수가 다르다는 걸 알려줬다. 간식으로 해 먹으려고 호떡믹스를 하나 샀고 쟁여 둔 빠삐코가 동 나서 아이스크림을 열 개 샀다. 이 또한 의욕적인 어린이가 골랐는데 수박바랑 스크류바가 3개씩이나 되었다. 이런 싼마이웨이.


하지만 난 그녀의 이 모습 그대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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