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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희숙 Oct 12. 2024

아홉 살도 애환을 느껴

   

 크게 숨을 쉬면 기침이 나와. 그러니까 그렇게 깊게 숨 쉬지 말고 나눠서 여러 번 쉬자.  

    

 막힌 듯 숨을 쉬어 뚫으려 하면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교문을 나설 때가 생각이 난다.

아직도 성함을 기억하고 있다지. 조용수 선생님.     


 언제 적 선생님인데 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냔 말이냐면.

그때 난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서 세상을 홀로 맞서고 있었을 때란 말이거든.

그런데 고작 2 곱하기 2 곱셈을 못 해서 선생님과 남아 곱셈을 외우고 학교 교문을 함께 나서고 있었어.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아주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고 계시 단 걸 어린 가슴에도 알아챘나 봐. 두 손 잡은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거든. 삼촌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어.     


 부모님은 1990. 2월 19일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남동생과 이제 2학년 되는 우리 남매의 책상을 보러 오토바이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신호대기 중 반대편 차선에서 용달차가 중앙선을 넘어 우리 부모님을 덮쳤고 그대로 부모님은 튕겨 나가 1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하셨다.

 그 사고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셨고 아버지보다 더 심하게 다친 어머니는 다리 한쪽을 평생 굽히지 못하는 장애를 입으셨다.      


 그 후 병원에 계신 부모님을 두고 동생과 입학하는 첫날,

하천의 다리 위에 내 뒤를 따라오던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뒤 돌아봤을 때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개구리처럼 쓰러져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을 뒤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가정이 있던 삼촌들 손에 맡겨졌다.

그러고는 일주일, 2주일씩 스스로 짐을 싸고 풀며 삼촌들의 그리 멀지 않은 집을 혼자 걸어 오갔다.

한 집은 가족이 서로 너무 사이가 좋은 집, 한 집은 가족이 서로 너무 사이가 좋지 않은 집.  

    

 서로 너무 좋은 집에서는 내가 흠이었고, 서로 너무 좋지 않은 집에서는 내가 짐이었다. 나는 나의 위치를 너무 잘 알았다.     


 1년 후 부모님께서 퇴원하시고 학교 가야 한다고 나를 깨우고서는 엄마는 화를 내시고 우셨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자식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잘 때 누군가 큰 소리로 깨우면 눈물이 나고 서러웠다.

  

 지금은 큰 소리로 나를 깨우는 사람이 없다.

살며시 문 열고 들어와 뽀뽀해 주거나, 옅은 빛 사이로 손을 흔들거나 몸이나 머리를 살며시 어루만져 준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은 잘 때의 나마저도 깨어있는 사람처럼 존중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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