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다.
나는 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사실 시라고 말하기는 조금 오그라들지만 짧고 간결하게 일기를 쓰는데, 함축적으로 글 쓰는 걸 선호했던 듯하다. 누군가 읽더라도 모호하고 애매하도록.
잠들기 전 엎드려 시를 쓰다가 열이 났다.
그래서 빙그르르 돌아 시 쓰는 것을 포기하고 누웠다. 잠들기 전까지 아픈 배를 잡고 웅크릴 수도 허리를 펼 수도 없이 왜 이렇게 아프지..’만 되뇌었다.
모두 잠들어 있었을 밤, 나의 신음에 깬 아빠가 내 모습을 보고 차 안 막히면 30~40분 거리의 부산 부모님이 수술하셨던 병원으로 향했다.
“애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저렇게 몸이 약해서..”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고 수술실로 곧장 들어갔다. 그러고는 의사 선생님이 새까만 덩어리를 들고 나오셨고 어머니께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부모님께 말씀하셨더랬다.
검지 손가락 길이만큼 나의 오른쪽 배에 움푹 패 길이 났다.
우연찮게도 가족 전원이 그 병원에서 모두 수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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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강하게 잡아 이끄셨다.
더운 날에 다리 불편한 엄마와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고 있었다. “애가 아프면 아프다고 진즉에 말하지. 이렇게 몸이 약해서..”
진찰하신다고 다리를 보자마자 의사 선생님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이 정도면 아이가 엄청 아팠을 텐데 모르셨어요? 아이가 이야기를 안 했어요?”
허벅지 뒤가 시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보였 댔다.
얼룩덜룩 수포가 지어졌다가 가라앉는 중이었지만 왜 어떤 이유로 병원을 끌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리를 절었던가.
다만 의사 선생님의 말투와 엄마를 나무라시던 얼굴만 기억날 뿐이다. 대상포진이었다.
아직도 허벅지 뒤쪽에는 대상포진으로 만들어진 아이의 손바닥 크기의 멍과 같은 흉터가 남아있다.
되돌아볼 것도 없이 나는 어린 나이부터 우울이었는지 불안이었는지 마음에 구멍이 뚫려있는 아이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집안의 분위기는 불가항력적으로 나를 깊게 침잠하게 했다.
자신들을 돌보기도 힘에 부쳐 보였던 부모님을 보며 나는 나의 아픔은 아픔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아프면 온 마음으로 짜증을 내던 그 눈빛을 받아 낼 힘이 없었던가.
젊은 나이에 장애인이 되신 활달하셨던 엄마는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종종 받는 못된 놀림에 마음이 아픈 적이 많으셨고 성격, 가치관 등 많은 부분에서 아빠와 다른 엄마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하셨던 터라 부부싸움이 크게 일어난 후에만 잠깐 사이가 좋으셨다.
온몸으로 싸움을 막아대던 어린 나는 그런 절망스러운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나의 마음과 비슷한 슬픈 노래를 듣거나 시를 쓰거나 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구멍이 난 쪽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듯 서늘해지거나 마음이 깊이 가라앉을 때면 아주 마이너 한 곡을 찾아 듣거나 이렇게 글로 끄적인다.
그 특기로 마이너 한 감성으로 위로를 주는 글과 곡을 쓰며 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나는 나처럼 우울하거나 침잠되어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응원한다.
무던히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는 이들을 보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존경스럽다.
그건 머물러 있지 않겠다, 나아가겠다고 하는 다짐일 것이다.
그 감정이 오기라 불릴지언정 나는 그것이 그대의 삶을 지탱해 주는 지지대라 믿는다.
인생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을 뒤로하고 오늘도 악을 쓰며 힘을 내는 당신에게 나도 지지의 힘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