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숙, 내가 올 때까지 두 손 높이 들고 있어!”
교실에 남은 건 나밖에 없었다. 배는 너무 아픈데, 나는 배를 쥐고 있을 수도 엎드려 있을 수도 없었다. 그저 다시 돌아온 담임 선생님한테 이유도 없이 혼날까 봐 두 손 하늘로 번쩍 올려 받치고 있는 걸상 때문이다.
돌아오신 선생님이 다시 물으셨다.
“언제부터 배가 아팠다고?” “.. 음.. 점심 먹기 전에 4교시에 벌서고..” “ 다시 말해봐! 그래서 나 때문이라고?”
“.....” 응? 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상으로 그게 맞는데 그걸 뭐라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단체로 걸상을 들고 벌을 서고 있던 때부터 점점 아파졌지만 어찌할 도리없이 팔도 못 내리고 울고 있었고, 그걸 본 친구들이 말해주어 단체 기합이 중단되었고 점심시간은 배가 아파서 엎드려 끙끙대었고 수업 후 남아서 벌서고 있었다.
말할 때마다 팔을 손으로 그리고 회초리로 때리는 선생님은 격앙되어 “어? 그래서 나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봐.”를 수도 없이 외쳤고, 나는 그게 왜 자신 때문이라고 하는지, 연관관계를 찾을 수도, 뭐라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만 휘젓고 눈물만 흘렸다.
내가 아픈 걸 너무도 싫어하는 엄마보다 더 싫어하는 것만 같아서 아픈데도 참았다.
해가 그림자를 길게 만드는 시간,
모든 친구가 하교하고 항상 같이 집으로 걸어 다니던 친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하는 눈빛 앞에서 너무나도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뭐라 할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엄마의 반응은 달랐다.
나의 멍투성이 팔을 보시고 화가 단단히 나심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또한 내 잘못이었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맞았겠지...” 억울한 줄도 몰랐다.
‘내가 아픈 게 잘 못 한 것이겠지.’
나에게는 크게 말씀 없으셨지만 어쩌다 듣게 되었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애를 저렇게 때리고, 저 지경을 만들고 그러시면...”
나는 이 이후로 어떤 선생님에게도 반문하거나 요구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없게 된다.
선생님은 다 옳고 그 어떤 행동과 말에는 이유가 타당할 거라고 믿었고 맞거나 혼이 나면 맞을 짓을 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한없이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다 보면 내 생각과 의도와 행동이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삶을 스스로 이뤄 나가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며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20대 초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너는 혼자서 제대로 하는 것이 없냐.”는 그 말이 지금껏 가장 뼈아픈 말로 되새겨지는 것을 보면 그때의 나도 나를 아프게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결과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위치와 자기 생각과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상대방에게 그 탓을 떠 넘겨버리기도 하니까.
심리에서는 그걸 방어 기제라고 한다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의 선한 의도대로 살아간다면 스스로 쓸모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의 의도나 상황과는 상관없이 왜곡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그런 사람이 나와 마주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걸 굳이 내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어디서는 깨닫게 된다.
나 아니더라도 그들에겐 그런 자신의 시기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