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나이가 들어서 쇠퇴한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살기에 불편하지는 않지만, 학창 시절엔 많이 불편했다. 우리나라 교육 방식에 크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기억력(암기력)이다. 그래서 학년이 올라가고 외워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학교 성적이 점점 하락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과 성적이 비례하지 않는 괴로움이 컸다. 암기력, 수리력, 체력 등 서너 개의 능력이 있으면 빛을 발하던 그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력(力)"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모방력, 재구성력에 더해 약간의 창의력인 것 같다. 성인이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기 시작한 질문력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기억력, 수리력, 순발력, 언어구사력, 창의력, 체력, 인내력...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많은 "력"이 있지만 그 표현이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가진 숨은 능력들이 어마할 텐데, 이름 붙여지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진심을 잘 꺼내어 표현하는 진심력,
생각을 비워내는 멍때림력,
특별한 날을 잘 기억해서 기념해 주는 축하력,
상대방의 원하는 선물을 잘 캐치하는 선물력,
사람들이 잘 모이게 만드는 모임력,
사람의 기분을 잘 구별해 내는 마음읽기력,
혼자서도 밥 잘 먹는 혼밥력,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여유력,
영악한 짓을 잘하는 여우력(여유력의 오타에서 비롯됨),
잊어야 할 건 잘 잊는 망각력...
엉뚱한 상상력이 좋은 사람들이 모이면 끝도 없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이름 붙여진 력과 붙여지지 않은 력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각자의 삶에 따라 더 개발되거나 덜 개발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용불용설처럼 사용되지 않는 것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몇몇 한정적인 서너 개의 력이 필요한 중고등학생들을 보면서 자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길러질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있을 텐데.. 아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각자의 고유한 력이 있을 것이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드러나는 고유한 아이력. 집중력, 수리력, 암기력 이런 것이 없어서 주눅 들기보다 고유한 력을 발견하고 발휘하면서 가슴 펴고 당당히 걸어가길. 또한 그 력을 인정해 주는 세상이 되길.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