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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소녀 May 28. 2021

어디 또 젖은 곳은 없고?

어제는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요즘 들어 비가 부쩍 자주 오는 것 같다.

아침에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 우산을 챙기고, 우비를 입히고, 장화를 신겨야 해서 아이들을 준비시키는데 드는 시간이 평소보다 더 많이 걸린다. 그리고 등원하는 길에 반가운 물웅덩이라도 만나면 아이들이 둘 다 신이 나서 장화를 신은채 "첨벙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기에 엄마가 되고 나서는 비 소식이 예전처럼 반갑지가 않다.


하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내리는 날을 참 좋아했었다.


"이슬비 내리는 이름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이 노래를 계속 부르며 학교에 갔다.

그 당시에는 요즘과는 다르게 때를 잘 타지 않는 검은색이나 파란색, 남색 같은 어두운 계열의 우산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 어린 나는 예쁜 꽃들이 그려져 있는 분홍색의 우산이 갖고 싶었다. 또 우산 끝에 묶여 있는 실이 풀려 한쪽으로 찌그러진 우산을 엄마가 손에 들려주는 날이면 그 우산이 너무나 창피해서 혹여 누가 볼까 봐 우산을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하지만 등굣길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나면 어린 마음에 신이 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장화를 신은 두 발을 "풍덩풍덩" 소리가 날 정도로 담그고 또 담그면서 늑장을 부리며 학교에 가곤 했었다.


큰 아이는 올해 8살이어서 혼자서 제법 우산을 잘 쓴다. 하지만 둘째 아이는 아직 어려서 어제 아침에는 우산을 같이 썼다. 혹여 아이가 비를 맞을까 봐 우산을 아이 쪽으로 기울여서 씌워주다 보니 내 오른쪽 팔과 다리 쪽거의 다 젖어버렸다. 하지만 아침에 약속이 있었기에 옷을 갈아입지 못한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있는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있었다. 신호에 걸려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옆에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우산을 씌어주다가 본인의 재킷이 흠뻑 젖은 것처럼 보였다. 등 쪽이 거의 다 젖어서 속에 입고 있는 옷이 다 비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비를 입고 있는 아이의 머리가 혹여 비에 젖었을까 봐 챙겨 온 수건으로 계속해서 아이의 머리를 열심히 닦아주고 계셨다.


"어디 또 젖은 곳은 없고?"


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는 수건을 잡은 손을 바삐 움직이셨다. 바쁜 아침에 아이에게 우비를 입히고 장화를 신기고 아이 어린이집 가방을 챙겨서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나오셨을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바쁜 와중에도 수건까지 살뜰히 챙긴 아버지를 보니 아이에 대한 사랑(父情)이 남달라 보였다. 우비를 입어서 뽀송뽀송해 보이는 아이의 머리카락과 비에 젖은 아버지의 등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였다. 이제는 그 수건으로 아버지의 젖은 머리카락과 옷을 좀 닦으셔도 되겠건만 신호가 바뀔 때까지 끝까지 아이만을 신경 쓰시며 챙기시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니 '이것이 사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 아이는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이가 비를 맞아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아이는 그저 비 오는 날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아빠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줘서 기분이 좋은 건지 그냥 아이답게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의 앞쪽에 있었기에 아빠의 젖은 머리와 등을 전혀 보지 못했다.


마치 커다란 나무가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옆에 있는 자그마한 어린 나무에게는 최대한 큰 그늘을 드리워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본인의 몸이 젖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아이만을 걱정하고 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라도 팔을 뻗어 그분에게 잠시나마 우산을 씌워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분 이외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행여 아이가 비를 맞을까 봐 본인의 어깨와 팔, 다리 한쪽을 기꺼이 비에 내어주는 많은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씩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을 탔을 때 내 귓속으로 이러한 따뜻한 말이 스며들어올 때면 그날은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해서 나온 소중한 "말 보물"을 발견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이 살며시 귀에 담길 때면 평소에는 온갖 소음과 소리를 듣느라 지쳐있던 귀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말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은 마치 잉크방울이 물에 잔잔히 퍼지듯이 내 가슴과 머릿속으로 곱게 퍼지며 새겨진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처럼 부슬비가 내렸다.

''어디 또 젖은 곳은 없고?''라는 따뜻한 말 덕분인지 어제와 같은 비인데도 오늘은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해맑게 웃으며 비를 좋아했던 어린 내자라면서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같이 놀자며 말을 걸던 빗소리를 점점 듣지 못했다. 그저 비 오는 날엔 옷과 신발과 양말이 젖으니 비를 조금은 불편하고 귀찮은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로만 여겼었다. 

비 오는 날에도 운동화를 신는 나를 보며 오늘 아침에 둘째 아이가 말을 건넸다.

''엄마, 내가 장화 사줄게. 나 지갑에 돈 있어.''

아직 5살밖에 안된 아이지만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너무나 기특하고 예뻤다.

아이의 말처럼 내가 장화를 다시 신게 되면 예전처럼 비를 다시 좋아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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