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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이야기

by 돌강아지 Dec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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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에는 전 종류는 하지 않고

나물과 생선, 탕국만 했다.


나는 도라지와 고사리가 제일 좋다.

다른 반찬은 거의 설탕이 조금씩은 들어가야 맛있는데

나물은 소금이나 간장만 넣어도 맛있는 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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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배려심이 많을 것 같은 나물들.

배려심이 많아서 다른 반찬들 사이에서 튀려고도 하지 않고 검소해서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는다.

누구 하나 외톨이가 되지 않고 두루두루 챙겨가며

사이좋게 지낼 것 같다.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호박나물 단배추 나물


나이가 들수록 나물반찬이 더 맛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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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나물 하니까 어릴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명절이라 동갑 사촌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놀았다.

 번은 사촌이랑 인형 목욕을 시켜주기로 했다.


그때 우리 집은 씻는 곳과 부엌이 같이 붙어 있었는데

엄마가 나물을 씻어 놓은 곳 옆에서

생각도 없이 인형 거품목욕을 시켰다.

명절이니까 인형도 목욕하는 거야...!


당연히 우리를 발견한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물 씻어 놨는데 인형 목욕을 시키냐며

인형을 던져버렸다!


그때 인형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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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난 우리는 집안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다.

방황하다가 동네 냇가에 낚시꾼처럼 자리를 잡았다.


엄청 까불이였던 사촌도 조용해지고 나도 주눅이 들었다.

허리가 부러진 인형도 인형이지만, 그보다 동갑 사촌

앞에서 그렇게 볼품없고 품위 없이 혼이난 

창피하고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호스트(?)인데!


커서 이 얘기를 엄마한테 다시 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자기가 그랬냐면서 그때 일을 굉장히 미안해했다.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서 그렇지 지금 생각하면

나물 옆에서 거품 목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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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 언니가 추석이라고 엄청 큰 배와 고구마,

할머니께서 담았다는 식혜를 큰 병으로 두 병이나 줬다.

언니는 애들도 있고 나눠 먹을 사람도 많을 텐데

꼭 우리도 이렇게 많이 준다.

정말 착한 언니다.

언니가 준 건 뭐든지 좋고 맛있다.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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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한테 나훈아 쇼 한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집이 티브이가 없어서 모를까 봐 전화한 거였다.

진짜 몰랐었는데 이모 덕분에 엄마가 나훈아 쇼를 볼 수 있었다.

노트북으로 봤는데 엄마가 좋아했다.

이모에게 감사하다.

잠깐 옆에서 같이 봤는데 나도 빠져들 뻔했다.


그리고 테스 형이 누군가 했는데 소크라테스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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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때 엄마랑 마당의 낙엽을 태웠다.

낙엽 태우는 냄새가 참 좋았다.

빨간 불씨가 숨 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꺼질듯하면 후 불어서 다시 살리고

또 꺼질듯하면 낙엽을 넣어서 다시 살리고.


눈을 따뜻하게 해 주면 좋다고 들었다.

눈이 조금 안 좋은 나와 엄마는 모닥불 온기에 따뜻해진 손으로 서로의 눈을 찜질해줬다.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평화롭고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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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다 태우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친구랑 통화를 했다.


명절 음식은 무엇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시장에서 국화 꽃다발을 산 얘기, 색소폰 연주를 기가 막히게 하는 신유식 님을 본 얘기, 작은 영화관이 생긴 얘기, 시집을 선물 받은 얘기 등등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지붕 위로 달이 떠올랐다.


내가 달이 보인다고 하니까 친구도 달이 보인다고 했다.

친구랑 같은 달을 보면서 같이 소원을 빌었다.

내가 '모두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하고 비니까

친구가 소원은 구체적으로 비는 거라고 했다.

어쨌든 우리의 소원 안에 서로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친구가 요즘 읽는다는 이병률 시인의 시를 몇 개 읽어줬다.

차분하고 꾸미지 않은 친구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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