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 여기는 벌써 태양 볕이 쨍쨍 뜨겁다. 숙소가 있는 작은 골목을 빠져나오니, 일상을 시작하는 이곳 사람들의 분주함과 활기가 가득했다. 학교 가는 소년소녀들, 수레에 첩첩이 쌓아올린 리뾰쉬카를 파는 상인, 과일노점상 앞의 사람들, 택시를 잡느라 바쁜 사람들... 도로 위를 달리는 차 뒤로 한바탕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사막도시구나 여기. 길가의 자동차 경적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공중에 섞여 분주히 떠다니고 있었다. 여행자인 내 마음은 벌써부터 두근대었다.
레기스탄 광장 쪽으로 걸었다. 미니마켓도 있고 솜싸를 파는 집도 있고 미용실과 이발소가 보였다. 정체모를 작은 가게들도 길 위에 알알이 박혀있었다. 여기는 정갈하고 아담한 황토빛 사막도시 사마르칸트. 얼굴선이 진한 소그드인들이 많이 보였다. 소그드인은 고대 페르시아인 계열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을 칭하는데 이 소그드인들이 모여 살았던 ‘소그디아나’라는 지방이 현재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단다.
아... 맑은 태양 아래 드넓고 푸르른 레기스탄 광장! 나는 광장 왼쪽의 울르그벡 메드레쎄로 들어갔다. 메드레쎄의 벽타일은 주황, 초록, 파랑, 노랑 등의 색상과 기하학적 문양, 아랍글자로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섬세하고 정밀한 장식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메드레쎄 안쪽에는 사각형으로 빙 둘레 지어진 네모난 마당이 있었는데 그 주위로 기념품 가게들과 작은 박물관들이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메드레쎄 안쪽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여인들, 약간은 무료한 듯 앉아있는 상인들, 그리고 나와 같은 여행자들이 보였다.
태양이 사선으로 누워 들어오는 메드레쎄, 깨끗하고 푸른 하늘, 짹짹 간헐적으로 들리는 새소리.
고요하게 천천히 흐르는 나만의 시간, 내 마음은 깊은 호수같이 충만하고 평온했다.
"앗살라무 알레이꿈!"
누군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눈을 들어 보니, 내 앞에는 페르시아 왕자님이 서 있었다. 알라딘인가 아니면 중동 왕자인가. 진한 얼굴을 한 잘생긴 청년이 어린애 같은 순진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그야말로 안구가 세상 맑게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28살의 이 청년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페르시아 왕자는 내게 서툰 한국말을 건네며 수줍어했다. 우리는 번역기를 이용해서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어디선가 혜성처럼 등장한 남자. 그는 우리 둘 사이에서 영어와 우즈벡어로 통역을 해주기 시작했다.
정체모를 이 남자에게는 성숙함과 섹시함 그리고 마초적인 매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누구냐 넌.
그의 영어에 러시아식 억양과 발음이 묻어났고, 그것은 그를 사정없이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안드레이’나 ‘이반’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금발 러시아 남자는 아니었다. 대체 이 묘령의 남자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영국 배우 톰 하디를 똑 닮았다. 아...이 남자. 혼미해지는 정신을 세상 붙들어 매야 했다. 체면이 있지 이래서든 아니 되었다. 페르시아 왕자가 떠나고 난 자리에, 이 톰 하디 같이 생긴 남자와 나만 남았다.
"도와줘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저는 러시아 쌍트뻬쩨르부르크에 사는데 오랜만에 고향에 휴가 왔어요.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났는데 십대 때부터 혼자 러시아에 가서 쭉 살았거든요. 지금은 거의 러시아사람이죠 뭐. 우즈벡어도 이제 많이 까먹어서 서툴러요 그래서 아까 통역할 때 힘들었네요. 하하하..."
이 남자는 아미르.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으로 산단다. 그는 군장교로 오래도록 복무하다가 몇 년 전에 그만두고 원래 하고 싶었던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사업 초기단계라서 기반이 잘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우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 우즈벡 전통음식 쁠롭 먹어봤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쁠롭 먹으러 갈래요? 저도 배고프거든요."
당연하지 그런 걸 왜 물어보냐고. 하지만 "네 그래요." 라고 절제력을 발휘하여 짧고 부드럽게 답했다. 속으로 이건 좀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런 유치함이 웃기는 거였다.
"한국에서 무슨 일해요? 우즈베키스탄은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다 했어요?
"춤을 지도해요. 너무 또 쉼 없이 일만 했던 것 같아요. 무용수 생활도 그렇게 하다가 끝냈죠. 이제는 춤을 지도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졌어요. 도대체가 저는 무슨 정신 문제가 있는 건지 중간이 없어요.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게 행복할 뿐이고요." 이 말을 하면서 나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지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죠 뭐. 걱정 할 게 있나요? 지금을 만끽하세요."
그의 말이 여행의 환상과 로망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전형적인 영화대사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시에 내 삶과 일상을 채우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신경을 써 줄 마음조차 없으면서 그저 걱정치 말라고 무성의하게 뭉개 버리는 답변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보통의 나라면 약간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이 올라왔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뭐 그런 것들을 기대할 바도 아니었고, 그의 말에 그저 껍데기 같은 가벼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는 러시아 버전 톰 하디였다.
끝.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느냐 말이다.
우리는 사마르칸트 시내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1층은 곧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는지 커다란 케이크와 풍성한 꽃들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하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앞쪽에는 작은 무대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우즈벡 면요리인 라그만과 우리나라 만두 격인 만띄를 시켰다. 같이 나눠먹을 샐러드도 시켰다.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레스토랑, 테이블 위 맛있는 음식, 그리고 내 눈앞에는 세상 매력적인 남자가 앉아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반갑게도 그는 나와 같은 84년생이었다. 그는 이미 우즈벡에서 결혼을 했고, 한 번의 이혼을 했으며 어린 아들도 있었다. 어린 아들은 타슈켄트에서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 맞다. 내 나이라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있을 그런 나이다. 새삼 내가 얼마나 그런 세계와 동떨어진 생각들을 하며 살았는지 잠시 아득한 느낌에 빠졌다.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사적인 질문을 했다. 왜 남자친구가 없냐 라는 그의 질문에 "이놈의 정신문제 때문에." 라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답했다. 갑자기 그가 빵 터져 웃었다.
나는 그와 대화가 꽤나 잘 통한다고 느꼈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라는 걸 나는 알았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나와서 무작정 걸었다. 그가 나에게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하라쇼! (좋아)"라고 말했다.
그는 고향에 대체 몇 년 만에 온 건지, 가는 길목마다 "와, 여기 예전엔 이거 없었는데, 새로 생겼다!" 라며 연신 눈을 비비며 감탄했다. 상 남자같이 생겨가지고는 좀 귀여운 면도 있었다.
내가 러시아어로 뻥긋대면, 그는 내게 빠르고 섹시한 러시아어 한바지를 선사해주었다.
"지금 나랑 있는 거, 즐거운 거지?" 그가 나에게 물었고, 나는 싱긋 웃었다.
방금 내 번호가 저장된 그의 핸드폰은 여전히 러시아 상트뻬쩨르부르크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사마르칸트, 어딘지 모를 이 거리. 신선한 저녁바람이 몸을 스쳐지나갔고, 길거리의 네온사인에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있었다. 길 위에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섞여 부스럭대었다. 로맨틱한 여행지의 밤이 무르익어가는 중이었고 나는 기분이 무척 들떴다.
그의 몸에서 향기가 났다. 프랑스에 있었을 때 중동아랍 남자들한테 나던 그 향기였다.
"자, 이리와!"
그가 갑자기 한쪽 재킷을 내게로 열어젖혔다. 들어오라고.
뭐야 어쩔 셈이야 이 남자. 아 진짜 나 어쩌라고.
밤 9시, 어두워진 도시에 비가 차츰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낮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레기스탄 광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여기서 숙소로 걸어가면 되었고 그는 어머니 집까지 택시를 타면 되었다.
택시를 타러 건너편으로 가던 그가 멈춰 서서 소리쳤다.
"오늘 우리 쁠롭은 못 먹었잖아. 내일 나랑 같이 먹으러 갈래? 너 내일도 여기 있으면.
그와 헤어진 그 길에서부터 숙소 의자에 몸을 기대는 순간까지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일 출발하는 부하라 행 기차표를 바라보며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우연히 교차하게 되는 것, 겉치레 없이 솔직하게 열리고 끌리는 것, 게다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도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고 즐거울 수 있는 게 얼마만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혼자 하는 시간들과 활동이 많아졌다. 인간관계로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대개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했다. 비록 가끔 외로울지라도 그게 훨씬 나았다.
오늘 처음 만난 그가 갑자기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물었을 때에도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혼자 여행하며 하루를 보내는 시간과, 그와 함께 할 가정의 시간 속에서 발생할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도 및 만족감의 정도를 놓고 빠르게 저울질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매력 때문에 계산은 이성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계산시간도 무척이나 짧았음을 명확히 밝혀두는 바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은 혼자만의 여행과는 다른 색깔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부하라로 떠나는 기차표를 보면서 확 취소해버릴까 라는 생각을 정말 했다. 가지말까 보다고.
그러나 나는 결국 예정대로 부하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계획한 일정을 순식간에 변경해 버릴 정도의 강렬한 내적충동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너무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만약 우리가 오늘처럼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또 다시 우연히 만난다면 그때는 내 몸과 마음을 다 던져버리겠어. 우리가 인연이라면 꼭 다시 만날 거야' 라는 어디 삼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아주 쓰잘데기 없이 이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상에 빠지면서 말이다. 하여튼 내가 이래서 문제다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