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기준
중학교 체육 시간, 오래 달리기를 하던 날이었다.
우리 반은 두 팀으로 나뉘었고 나는 선발팀으로
앞서 달리는 친구들의 등 뒤를 쫓았다.
상위권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며
'이 정도면 잘하고 있지'라는 생각으로
보폭을 유지했다.
하지만 뒤이어 출발한 후발팀의 선두는 훨씬 빨랐고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의 평균 기록도
우리 팀보다 월등히 좋았다.
'저 팀에서 달렸다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록에 만족하다가도
또 다른 1등으로 기준이 바뀌면서
아쉬움이 밀려왔던 그날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회인이 되고는 기준들이 더 높게 더 많이 변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물건들 하나하나에 설렘을 느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잊고 살았던 '진짜 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은 밖이 아니라,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정리 코칭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묻곤 한다.
“제가 정리를 너무 못하죠?”
“저 물건 정말 많죠?”
“보통 속옷은 몇 개가 적당해요?”
질문들 속에서 예전의 내 모습을 본다.
앞선 사람의 기준에 따라
내 속도를 맞추는 그 아이의 모습.
내가 마주한 그들은
결코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만의 기준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미니멀리즘이란 게 물건이 몇 개까지인지,
집에 공간이 얼마나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정리를 끝내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설렘의 총량’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양말이 좋아 서랍 하나를 가득 채우고
어떤 이는 블라우스를 수십 벌 갖고 있기도 하다.
스스로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자기만의 설렘 기준이 생긴다.
결국 기준은 깔끔하게 사는게 부러운 누군가도,
잡지에 나오는 멋진 미니멀 하우스도 아니었다.
오직 내 마음이 ‘설레는가’, 그 감각만이
유일하고도 정확한 기준이었다.
이제 나는 일상에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게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가?”
지금의 나에게 맞는지, 내 리듬이 중요해졌다.
타인의 속도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에 솔직해질수록,
마음은 비로소 충만해졌다.
남의 등을 보지 않아도 되는 평온함을 되찾고 나니,
문득 운동장에 있는 중학생 시절의
나에게 묻고 싶어졌다.
“누구의 뒤를 쫓는 게 아니라,
내 속도로 있는 힘껏 달렸다면 어땠을까?”
숫자나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내 한계를 정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미련이
이토록 오래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놀라운 건, 기준을 외부에서 내 안으로 가져오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이다.
내 안의 설렘을 이정표 삼아,
후회와 미련없이
나답게 살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