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라자냐는 늘 아쉬웠을까?

혀가 호강하는 방법을 몰랐던 시절

by 지혜




일본 료칸에서 일하던 시절,

어떤 한국 손님의 후기 중,


“혀가 호강했다.”


맛있었다는 말 대신

혀의 감각으로 표현한 문장이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후기를

일본 요리장에서 들려주었다.

그때 셰프의 기쁜 표정을 보고 나서부터는

음식 칭찬들이 있을 때마다 공유하곤 했다.



최근,

나 역시 그 손님이 말했던

본능적인 감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어떤 결정을 앞두고

좋은 기분에서 하려고 한다.

그래서 라자냐를 먹으려 한다.

조금 우스운 집착이었다.


나는 라자냐를 좋아하니까.



대학생 때,

X렌토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곳의 라자냐가 참 맛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라자냐는

정말 최고였다.




그 기억을 붙잡은 채

서울의 맛집이라는

성북동, 성수, 용산을 찾아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그때의 만족감은 재현되지 않았다.



최근 라자냐를 먹었을 때,

친구가 물었다.


“저번에 갔던 곳보다 더 나아?”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저번과 이번의 공통점.

물컹물컹한 식감.

치즈와 소스가 뒤엉킨 찜 같은 느낌.



아…

내가 원했던 건

라자냐라는 메뉴가 아니었다.



나는 면의 식감을 원하고 있었다.

라자냐와 함께 주문했던

넓고 납작한 파스타가

오히려 취향을 정확히 건드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둥근 파스타면보다

페투치네 같은 넓적한 면을 좋아했다.



그리고 또 떠올랐다.



봉추찜닭의 납작 당면,

인도네시아에서 즐겨 먹던 꾸에띠아오,

멸치 칼국수 봉지라면.



전부 비슷한 계열이었다.

납작한 면이 혀에 닿는 촉감.

그리고 쫄깃한 면발.



내가 좋아했던 건

국가도, 메뉴도 아니었다.

공통된 촉감과 식감이었다.



예전에는

‘라자냐’라는 개념에 묶여 있었다면

이제 나는

납작한 면이라는 감각 기준으로

훨씬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도삭면이나 비앙비앙면이 궁금해졌고,

칼국수나 베트남 볶음국수를 고를 때도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정보는,

라자냐도 스타일 차이가 있었다.

미국식은 찜과 같이 부드럽고,

내가 좋아했던 건 이탈리아 식의 라자냐였다.



같은 시트라도

요리 방식에 따라

물컹해지기도 하고, 쫄깃해지기도 한다.



넓적한 면이

소스를 잘 머금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크림소스와 만났을 때는

오히려 지나치게 느끼하게 느껴졌다.



스타일 차이나 면의 특징을 몰랐지만

단지 정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가게 탓을 할 뻔했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내 감각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나였다.



넓은 면의 촉감과 탄력을 좋아했다.







라자냐라는 한 메뉴에 집착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감각을 알고 나니

즐거움은 더 다양해졌고,

선택은 더 빨라졌다.




이제, 음식에서도

내가 설레는 촉감이나 식감의

감각 패턴을 읽게 되었고,

혀가 호강하는 순간들을 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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