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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고요한 밤의 공원

나와의 약속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을이 진 뒤 생수 한 병을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공원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일요일 밤엔 유난히 사람이 적다. 월요일의 압박 때문일까?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없지만 한적한 일요일 밤의 공원을 맘껏 누릴 수 있는 건 프리랜서의 특권일지도. 평소엔 창피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숨기고 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인적이 드문 구석진 길만 찾아다녔는데, 모처럼 넓은 광장과 큰길을 맘껏 걸으니 답답했던 가슴이 한결 시원해졌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느낌. 마치 관객 없는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는 기분이랄까. 텅 빈 객석을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엔 달랐다. 기획사도, 거창한 프로모션도 없는 이른바 ‘독립 뮤지션’에게 유일한 홍보 수단은 개인 채널. 나 역시 세상에 나를 알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건 늘 무관심뿐이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했던가. 인지도가 곧 경쟁력인 바닥에서 무관심이라는 반응은 말 그대로 최악의 성적표다. 세상의 철저한 외면에 지쳐 스스로 깊은 동굴에 들어가 나의 단점을 하나하나 곱씹다 보니 어느새 동굴 벽면은 나를 향한 저주 같은 말들로 가득 찼다. 넌 매력이 없어, 목소리가 별로야, 수준이 낮아. 어둡고 축축한 동굴에서 빠져나와 햇살처럼 따듯한 ‘관심’을 받는 날을 꿈꿨지만, 그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홀로 걷는 공원. 물결이 잔잔해서인지 넓은 호수가 까만 묵이나 젤리처럼 보였다. 뛰어들면 통통 튀어 오를 것 같은, 마치 시간이 멈춘 세상에 나만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지금이라면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지금이라면. 누군가에게 관심받고 싶으면서도 차가운 반응이 두려워 비겁하게 스스로 만든 동굴에 들어가 나를 할퀴고 때렸던 날들. 내 얼굴엔 그 상처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대중’이라는 넓은 바다만 바라보며 관심에 급급했던 나의 소리는 저 멀리 홀로 힘겹게 노를 젓는 이의 마음에 가닿지 못했다. 아니 닿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소리에 대답해 주길 바랐던 욕심이 부끄러워졌다. 내 얼굴보다 더.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고등학생 시절 동네 친구들과 밴드를 했을 때 자주 공연하던 장소였다. 그때 사람들이 앉아있던 계단에 관객이 되어 잠시 앉아 보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꽤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릴 귀엽게 쳐다보던 엔지니어 기사님들, 한없이 멋져 보이던 선배들, 손뼉 치며 소리 질러 주시던 어르신들. 생각해 보니 그땐 관심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나를 향한 평가나 시선도. 그저 연습한 걸 잘하자,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관객들의 환호는 그저 보너스 같은 거였다고 할까. 오히려 그때가 더 좋은 뮤지션이었다. 무언가 바라지 않았고 날 해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즐거웠던 걸까? 난 그때의 날 마주하기 부끄러운 어른이 되어있었다. 추억에 젖은 김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과거의 나를 만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지금의 나보다 머리숱이 풍부한, 하얗고 작은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으악! 얼굴이 왜 그래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그렇군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어요?”

“불우한 예술가가 되었지.”

“그게 뭔데요?”

“배고픈 음악가라고 할 수 있지.”

"…………."

“그럼 전…….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나도 궁금해. 그래서 걷고 있어.”

“걷는다고요?”

“응. 걷다 보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쳤어요? 지금 한가하게 걸을 때예요? 당장 뭐라도 해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아마 5분도 채 되지 않아 꿀밤을 날리지 않을까 싶다. 건방진 자식. 상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이 스쳐갔다. 난 그때의 나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넌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더 있으면 우울해질 것 같아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원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쯤, 두고 온 말이 떠올랐다. 고요한 일요일 밤의 공원이라 멀리 있는 소년에게도 닿을 것 같았다. 난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리고 공원을 빠져나갔다.

‘약속할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걷는 것도. 나를 치유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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