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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하쿠나 마타타

티몬과 품바

피부병이 생긴 후로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언제 나을지 모른다는, 어제보다 더 심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침대 머리맡에 가득 쌓여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룬 날이 없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에 비하면 환절기 감기 수준인 병. 소중한 것을 잃고 일상을 빼앗겨 보니 불행 속에서도 빛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삼 존경심이 들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애써봤자 나만 손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 휘청이다 못해 고꾸라져 보니 알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는 걸.




햇빛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공원으로 향했다. 꿀을 발라놓은 듯 은은한 오렌지빛이 번진 거리. 일과를 마친 꿀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어두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자연의 빛을 조명 삼아 다시 무대에 오르는 달콤한 상상에 빠져있는데 옆에서 분위기를 깨는 고함이 들려왔다. “아이고, 그만 좀 해 이 녀석아!” 고개를 돌려보니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 두 마리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계셨다. 한 녀석은 제법 덩치가 컸는데 어찌나 힘이 좋은지 황소처럼 아주머니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다른 녀석은 작고 말랐는데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이컨택을 하며 호기심이 보였다. 어느덧 내게도 다가와 한참 냄새를 맡더니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휙 하고 가버리는 녀석. 금세 날 앞서가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다 문득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티몬과 품바. 영화 ‘라이온 킹’에 나오는 아기 사자 심바의 친구들이다. 영화는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가 왕이 되는 스토리지만 어릴 적 나는 심바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티몬과 품바와 함께 아름다운 계곡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영화 라이온 킹의 환상적인 OST 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하쿠나 마타타’를 부르며. 생각해 보니 걷기 시작한 후로 음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어폰을 챙겨 온 건 이런 상황을 예견해서일까. 다급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곡을 검색했다. ‘아, 바로 이거지!’ 음악이 나오는 순간 불그스름한 석양을 향해 총총거리며 걷는 강아지들이 티몬과 품바로 변했고, 난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세렝게티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 음악은 이럴 때 마법이 된다. 둠칫 둠칫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경쾌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내가 듣는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는 듯했다. 리듬은 무섭다. 내적 흥겨움을 억누르느라 공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하쿠나 마타타. 곡의 메시지는 대략 이렇다. ‘근심과 걱정 모두 떨쳐버려, 욕심 버리면 즐거워져’. 어찌나 내게 찰떡같은 가사인지. 예전부터 좋아했던 곡이지만 처한 상황 때문인지 마치 나를 위해 만든 노래처럼 여겨졌다. 음악가 무리에서도 떨어져 나온 나. 심바처럼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을지. 반겨줄 사람이 있기나 한지. 티몬과 품바가 이런 나를 보면 어떤 말을 해줄까? 아마 말 대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줄 게 분명하다.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적어도 내가 아는 최고의 긍정 캐릭터를 뽑으라면 고민하지 않고 티몬과 품바를 고를 것이다. 박자에 맞춰 흥겹게 걷다 보니 어느새 만 보가 훌쩍 넘어있었다. 다리가 쌩쌩한 게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워 한 바퀴를 더 돌기로 했다. 잠시 노래를 끈 뒤 내가 가진 ‘근심과 걱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걱정이란 이러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봐 마음 쓰는 것. 무명의 음악가에게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어떻게든 계단을 밝고 올라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능력 밖의 일에 떼쓰며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던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큰 그릇’의 사람이 아니었던 난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할 때마다 쉽게 상처받고 주눅 들었다. 마치 다른 이들의 노력과 간절함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말이다. 흔히들 성공하는 사람은 ‘독기’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독기를 품었던 걸까? 노력의 독기가 아닌 욕심의 독기는 아니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어릴 적엔 그저 신나는 곡처럼 들렸는데 어른이 되어서 들으니 인생의 철학을 노래하는 듯했다. 어쩌면 걱정을 버린다는 건 욕심을 버리는 것 일수도. 아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도 내려놓자. 오늘은 그저 ‘하쿠나 마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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