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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숲의 노래

춤을 추는 음표들이 푸른 나무처럼 숨을 쉬는

7월과 함께 찾아온 강렬한 햇살은 대기를 뜨겁게 달궜고, 얼굴에 분화하는 화산활동도 거세졌다. 열에 취약한 병이니 격한 운동이나 사우나 등은 피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피부병이 생긴 후 맞이한 첫여름. 완벽한 계획 없이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타입의 내가 무작정 떠난 건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다가올 여름을 대비한 휴식이라는 단순한 목적을 가진 여행.  가벼운 짐들 들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른 아침 공항에 도착해 예약한 렌터카를 전달받고 향한 곳은 사려니숲길.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서인지 숲길 인근은 한산했다. 도착 후 마침 비가 그쳐 차에 우산을 넣어두고 본격적인 숲 탐방을 시작했다. 숲에 들어서자, 아침 이슬을 한껏 머금은 나뭇잎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며 나를 반겼다. 싱싱한 초록의 우산 아래 퍼지는 꽃과 풀의 향기. 삶엔 이런 행운도 있구나, 하며 숨을 들이켜자, 신선한 공기가 안쪽 가득 스몄다. 답답한 지하에선 느껴보지 못한 맛있는 공기. 오랜 허기를 달래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니 폐가 정화되고 나아가 몸 전체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5성급 호텔 뷔페 부럽지 않은 만찬. 영양분 가득한 공기를 마음껏 섭취하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지긋지긋하게 낫지 않던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두통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깊은 상처를 꿰매고 그 위에 연고를 바르듯 나무와 풀잎은 나의 숨이 되어 내 몸 구석구석을 치료하고 있었다. 엉켜있는 회선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망가진 시스템이 복구되는 과정.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은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약보다 효과적이었다. 정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시스템은 첫 업무를 실행했다. 얼마 만이었을까. 나에게 칭찬을 건네본 게. 난 숲의 한가운데서 작게 읊조렸다. 그동안 꾸준히 걷길 잘했어.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어.


한 시간 반가량의 산책을 마치고 비자림으로 이동했다. 잘 정돈된 길을 걸으며 개성 있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이 만든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듯했다. 모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가 하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은 듯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얼핏 봐도 몇백 년은 저렇게 살아왔겠구나 싶은 나무도 있었다.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린 같은 종의 나무라도 햇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미묘한 지형의 차이에 따라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슬슬 다리가 뻐근해져 숲 속 깊숙이 놓인 벤치에 앉았다. 관람 동선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한적하고 고요했다.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내 음악도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커다란 숲은 아니더라도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 스스로 배어버린 건 아닐까. 나를 향한 혐오와 비난이라는 도끼질로. 크게 한숨을 뱉고 나무를 올려다보니 크고 작은 잎사귀 하나하나가 음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저 넓은 잎사귀는 2분 음표쯤 되겠군. 작고 촘촘한 게 16분 음표네. 그렇게 숲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기록하듯 짧은 음성 녹음과 메모를 했다. 여행을 마치고 작업실에 돌아가 여름이 끝나기 전에 곡을 완성했지만 세상에 나오기까진 3번의 여름이 더 필요했다.

비자림을 떠나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아침부터 이동해 꽤 많은 걸음을 걸어 피곤하기도 했고, 숲에 가기로 한 여행의 목적은 일찌감치 달성했으니 저녁 스케줄은 쉬면서 찬찬히 생각해 볼 참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평소와 다른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암처럼 시뻘겋던 얼굴색이 분홍빛에 가까워진 것이다. 작은 면적이지만 분명 빨강과 분홍 중 고르라면 분홍에 가까웠다. 코가 닿을 듯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참을 확인하다 보니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 달라. 이전과 색깔이 다르다고! 세상에 나만 아는 그 작은 변화는 몇 번이고 손에서 놓을 뻔했던, 하지만 간절히 붙잡고 기다리던 희망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느껴졌다. 밤낮없이 욱신대던 얼굴의 통증이 잔잔해진 것이다. 강도와 템포가 느슨해진 느낌.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 세기와 간격에 대한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변화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나아지고 있어. 분명 나아지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던 병에 회복의 신호가 온 것이다. 이제 첫발을 뗀 거라 해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해도 괜찮았다. 단단한 암석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희망이란 새싹이 어찌나 야무지고 기특한지. 하루하루 걸으며 나에게 건네었던 다정한 말과 토닥였던 부드러운 손길이 만든 길 위로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어 마침내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밖은 궂은 날씨였지만 내 머리 위에 한라봉만 한 작은 태양이 떠 있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강하게 불어 호텔 앞 야자수가 서귀포 바다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이래야 제주도지’. 머리를 대충 말리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이동하는 도로 중간중간에 벌목의 흔적이 보였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려 대부분 공사를 쉬는 것 같았지만 나무가 베어나간 모습이 자주 보이는 걸 보니 개발할 곳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어떤 곳은 보존하려 하고, 어떤 곳은 망가트린다. 누군가는 지키려 애쓰고, 누군가는 가지려 애쓴다.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제주도가 자연의 모습을 되도록 유지했으면 좋겠다. 파괴되는 자연 위에 세워진 편리함과 풍요로움이 옳은 것인지, 지금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미래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허공에 따지게 된다. 어쨌든 나무는 많아야 하고, 더 많았으면 좋겠다. 씁쓸한 마음으로 도착한 섭지코지는 이곳이 관광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하기야 이런 날씨에 여길 누가 오겠어. 비바람이 거센 날 제주의 바닷가에선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다. 360도로 퍼붓는 비. 비싼 우산은 필요 없다. 어차피 다 젖거나, 막으려 끙끙대다 보면 박살 난다. 우산의 강도를 테스트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부병의 주 치료제였던 스테로이드엔 슬픈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건 머리카락이 꼬부라진다는 것.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의 경우 증상이 발현됐으니 적어도 0퍼센트는 아닐 것이다. 비와 바람에 사정없이 폭격당하니 안 그래도 꼬불거리던 머리카락이 난리를 쳤다. 영화 속 잘생긴 배우의 젖은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화장실로 피신해 거울에 비친 모습을 표현하자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20개쯤 떠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단정하게 정리하려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물음표들을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유민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전 정보를 거의 찾아보지 않고 갔던 터라 큰 기대는 없었다. 어떤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도착한 미술관은 입구에서부터 특유의 분위기로 날 빨아드렸다. 공간은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와 짙은 고요로 시간을 늘어트리더니 잔잔한 호수 위에 길게 뻗은 달빛처럼 전시된 유리 공예 작품들로 날 인도했다. 그날, 그 시간에 관람객은 나를 포함해 5명도 채 되지 않았다. 여행하기엔 분명 나쁜 날씨였지만 그로 인해 특별한 관람을 할 수 있었고 불행의 뒤편에 자리 잡은 행운의 생김새를 엿볼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클럽에서 잊지 못할 환상적인 공연을 본 것처럼 가슴에 기분 좋은 묵직함을 안고 미술관을 나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모름이 주는 맛도 가끔은 맛있는 것 같다. 숙소 근처 관광지 한 군데를 슬쩍 구경하고 돌아가 일찍 잠에 들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늦은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싣고 멀어지는 섬을 보며 언젠가 다시 제주도에 온다면 그땐 나무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나도 한 그루의 나무 같은 음악가가 되어 왔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렇게 희망의 새싹을 틔운 행운 가득했던 여행에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제주 섭지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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