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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열대야

덥고 습하다

장마가 그친 뒤 매미 소리가 경보음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뉴스는 “올여름 기록적인 더위가 예상됩니다.”라며 언제나 그랬듯 잔뜩 겁을 줬고, 그 말에 놀랐는지 얼굴엔 새빨간 열꽃이 피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밤공기도 뜨거워졌다. 여름은 악당이다. 나의 걷기를 방해하는 악당. 덥고, 습하고, 게다가 벌레까지. 그렇지만 걷기를 멈출 순 없었다. 사막을 횡단하듯 이 여름을 견디고 건너야 한다. 각오를 다진 후 전장에 나서는 장수가 갑옷을 두르듯 찬물을 흠뻑 뒤집어쓴 뒤 밖으로 나섰다. 습식사우나 같은 바깥공기에 곧장 백기를 들뻔했지만, 어느새 자리 잡은 습관이 내 등을 슬쩍 밀었다.


여름의 밤은 분주하고 활기찼다. 돗자리 위 삼삼오오 모여 캔맥주를 들이켜는 사람들, 기차 놀이하듯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 동호회, 분수대 앞 신나게 물놀이하는 아이들. 불과 며칠 전까지 맹꽁이들의 공연이 한창이었는데, 사람들이 들어차니 공원은 비로소 본래 모습을 찾은 듯 생기가 가득했다. 시끌벅적 에너지 넘치는 공원. 어쩌면 여름은 꽤 낭만적인 악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이 낭만을 함께 할 사람이 없는 게 서운해졌다.

증기기관차처럼 뜨거운 숨을 뱉으며 꾸역꾸역 걷던 중, 언젠가 한 선배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결혼 생활? 힘들지. 내 시간도 없고 자유도 없고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냐. 근데 일 끝나고 밤에 같이 맥주 한잔할 때. 그땐 진짜 좋아.” 맥주 마시려고 결혼하는 건가.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일상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사소한 오늘에 근사한 순간이 생기는 것. 그동안 애써 외면했지만, 줄곧 그런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고. 오늘 서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고, 때론 아무 의미 없는 주제에 다투기도 하면서. 한참을 그런 상상에 빠져있다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산책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슬프게도.


한낮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던 그날의 밤. 외로움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약해진 마음이 애처롭게 사랑을 갈구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난 이대로 평생 혼자 걸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나의 처지를 알고도 함께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걷는 길은 사방이 어둡고 축축하다. 작은 빛도 보이지 않고 눈앞의 모든 것이 그저 희미할 뿐이다. 이런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길 바란다면 그건 분명 이기심이고 욕심이다. 사랑도 어떠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난 애써 입을 연 내면의 소리에 답했다. 어떤 기대도 품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한숨 섞인 체념을 하다 보니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겨우 걸음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안쪽에 드리운 그늘이 다시 한번 짙어짐을 느꼈다. 열대야로 대기는 뜨거웠지만 마음은 차갑게 굳어만 갔다. 매미 소리가 소나기처럼 퍼부었고, 비에 흠뻑 젖은 것처럼 몸이 한없이 무거웠다.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어둠에 더 깊이 삼켜져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아주 깊고 캄캄한 어딘가로.


하지만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강렬한 여름의 태양보다, 무대 위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보다 밝게 빛나는 조그만 손전등이 나의 어둠을 걷어내리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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