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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실패 마일리지

차곡차곡

나의 실질적 롤모델은 십 대 후반에 만난 다섯 살 터울의 한 선배였다. 같은 스승님 밑에서 연주를 배웠던 그는 많은 제자 중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감각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 특출 났던 건 연습의 양이었다. 한번 부스에 들어가면 최소 일곱 시간 동안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의 놀라운 집중력과 체력은 밖에서 듣는 이들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괜히 샘나서 스승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스승님 수제자는 누구예요? 하고 앵무새처럼 물어볼 때마다 스승님은 귀찮다는 듯 뭘 자꾸 물어봐, 그놈이 제일 낫지, 하셨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의 우상이 인정받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선배는 간혹 연습하는 거 구경하고 싶으면 들어와, 하고 날 초대해 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와, 우와, 우아아아아악! 거리는 리액션을 은근히 즐겼던 것 같다. 그는 음원과 영상이 아닌, 내 앞에 실존하는 첫 번째 아이콘이었다. 기본이 탄탄해야 한다며 주야장천 재미없는 기본 연습만 하던 선배. 하루 종일 캔버스 위에 선만 긋던 지독한 연습벌레. 그렇게 나무작대기로 북을 때려대던 나의 아이돌은 훗날 세상의 해충을 다 때려잡겠다며 해충방제업체 사장님이 되었다. 오랜만의 모임에서 난 한참을 쭈뼛거리다 선배에게 질문했다. 형, 아깝지 않으세요? 그동안 정말 열심히 하셨잖아요. 선배는 안타까워하는 날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돈 벌면 다시 할 거야. 괜찮아.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도 드럼을 관뒀다. 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영향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선배 같은 사람도 쉽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되겠어, 하는 생각. 선배가 떠나고 그때껏 쌓아온 것들을 스틱과 함께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나니, 내 세상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막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그림을 파기하고 다시 펼친 캔버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른 채 무작정 그린 그림은 같이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머릿속에 그려왔던 이미지는 대기권 바깥으로 증발해 버렸고, 아이디어는 금세 고갈됐다. 기술적 한계에도 부딪혔다. 작사, 작곡, 편곡, 미디, 노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만든 소리는 말 그대로 불협화음. 다들 이십 대에 일군 땅 위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세우기 시작하는데, 마른땅에 삽질이라니. 그것도 서른이나 된 나이에. 조바심이 속사포 랩처럼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번쩍 스쳐 갔다. ‘아, 나 망한 거 같다.’

급히 정신을 차렸다. 늦은 만큼 서둘러야 한다. 뭐든 닥치는 대로 해서 일단 결과를 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당장 배를 채워 줄 달콤한 열매를 찾기 시작했다. 나의 나무에 물 주는 것도 잊은 채. 작업실을 채우던 음악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침내 뚝 끊겨버렸다. 공모전 정보를 확인하고, 음악 관련 회사에 넣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각종 지원 사업 서류를 작성하는 일종의 사무실이 된 것이다. 두꺼운 방음재로 둘러싸인 좁은 방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거기엔 리듬이 없었다. 그저 정신 사나운 소음만 있을 뿐이었다. 내 음악을 하고 싶어 많은 것을 버리고 선택한 길. 그토록 간절했던 마음은 현실의 압박 수비를 뚫지 못하고 쓰려졌다.

노력과 준비 없이 눈앞의 결과만 쫓은 ‘껍데기뿐인 도전’의 결과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아, 저 선수. 타율이 1할도 안 돼요. 매번 헛스윙이네요. 공은 보고 휘두르는지 모르겠어요. 쯧쯧.” 야구선수였다면 장내 아나운서가 이런 멘트를 하지 않았을까.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을 것이다. 계속되는 실패에 완전 녹다운이 된 나는 더이상 링 위에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살다 보면 누구나 과속방지턱 하나쯤은 마주치기 마련인데. 잠깐 속도를 줄일 뿐인데 세상은 더럽게 빵빵거린다. 빨리 가라고. 아니, 세상을 핑계로 내가 나에게 그랬을지도. ‘빨리 가라고! 옆에 차들 가는 거 안 보여?!’

             

후덥지근한 여름의 늦저녁. 공원을 돌며 지나간 실패를 곱씹어 보았다.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남들만큼 갖춰야 한다는 초조함에 노력과 준비의 시간을 건너뛰었던 도전. 연습 없이 완성에만 급급했던 초상화 속 못난 내 모습. 끝내 소멸한 실패의 마일리지. 정직한 노력으로 차곡차곡 쌓았다면 지금쯤 작은 보상을 맛보았을 거란 생각에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후회 끝에 따듯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처음 스틱을 쥐었을 때의 감촉. 좋은 실패로 가득했던 하루. 선배를 따라 느리지만 한 걸음씩 제대로 걸었던 그때의 나. 떠나보냈던 북들이 다시 돌아와 말을 거는 듯했다. 신나는 행진곡과 함께. ‘실패만 있었던 게 아니야, 다시 할 수 있어.’


당장의 결과만 좇다 중심을 잃었던 나는 ‘나쁜 실패’를 반복했다. 그리고 삐뚤빼뚤한 발자국을 남겼다. 다시 새하얀 캔버스를 마주한다면 곧게 뻗은 선부터 그려볼 생각이다. 노력이라는 ‘좋은 실패’를 쌓으며. 그럼 언젠가 볼 수 있지 않을까. 꿈에 그리던 멋진 초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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