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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Oct 22. 2023

페이스 조절

방향 > 속도

Sub 2 hour. 2시간 안에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자 세계 정상급 마라톤 선수들이 깨고 싶어 하는 꿈의 기록. 마라톤을 2시간 안에 완주하기 위해선 100m를 17.06초에 주파하는 속도로 42.195km를 달려야 한다는데, 말 그대로 ‘인간 한계’에 가까운 도전이다.

선천적으로 지구력이 부족해서인지 마라톤이나 철인 3종 경기 선수들을 보면 늘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매일 자신과 싸워 이기는 기분은 어떤 걸까. 가늠조차 안 되는 그들의 끈기와 인내심이 내게도 조금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루에 만 보 걷기’라는 작은 실천도 내게는 하루하루가 힘겨운 도전이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살아내기’란 그만큼 버겁고 어려운 걸까. 삶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분. 조금만 경사가 높아져도 쉽게 다리가 풀리고 오르막길을 만나면 금방 주저앉게 된다. 타고난 지구력 때문일까? 아니면 뛰는 방법이 잘못된 걸까? 난 지금까지의 레이스를 돌이켜 보았다.




출발선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사람, 작고 다부져 보이는 사람, 튼실한 하체를 가진 사람, 몸이 유연한 사람 등. 그들은 저마다 다른 옷과 신발을 신고 총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며 가슴에 빛나는 꿈 하나씩을 품고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뛰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룹 간의 격차가 벌어졌다. 한참을 앞서가는 선두 그룹의 사람들은 ‘재능’이라는 최첨단 운동화를 신고 빠르게 치고 나갔다. 그러고는 금메달을 놓고 자기들끼리의 경쟁을 시작했다. 중간 그룹의 사람들은 선두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기회를 엿봤다. 이탈자가 생기거나 속도가 느려질 상황을 노리면서. 내가 속한 곳은 가장 뒤였다. 최첨단 운동화도, 뛰어난 신체도, 강한 정신력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최하위 그룹. 하지만 그룹이라기엔 주변을 살펴봐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맨 뒤에서 힘겹게 그들을 좇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처럼 금세 벌어지는 간격. 뒤처지고 있다는 압박감에 나와는 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사람의 보폭을 흉내 내다 넘어지고, 무리하게 속도를 올려 호흡이 가빠와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 레이스. 지금까지 나의 레이스에는 ‘나만의 페이스’가 없었다.

 

천천히 걸으니 답답해 속도를 조금 올려 보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신기하게도 얼굴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바로 몰려왔다. 마치 아직 아니야, 하며 경고하듯이. 어릴 때 보았던 영화 ‘스피드’가 떠올랐다. 버스가 일정 속도를 넘어가면 폭탄이 터지는 설정이었는데 내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아프기 전엔 몰랐다.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고 있는지,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속도를 줄여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난 대체 어딜 그리 바삐 가고 있었던 걸까?


2시간이라는 꿈의 기록. 그 기록에 근접한 선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자세와 안정된 호흡으로 달린다. 그들이 레이스를 훌륭하게 완주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노력을 통해 만든 자신의 페이스로 달리기 때문 아닐까. 조금 늦고 뒤처지더라도 나만의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오늘의 최선’이라는 페이스로 달리는 것. 그 최선을 차곡차곡 쌓지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쫓기듯 달렸던 지난날은 나를 지치고 병들게 했다. 조바심 가득한 마음에 말을 걸어 보았다. ‘조금 늦더라도 괜찮아.’ 그제야 내가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건지 보이기 시작했다.

    

속도 경쟁에 빠져 방향을 잃었던 나의 좌충우돌 레이스. 거북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또 하나의 만 보를 채운 나는 힘겨웠던 뜀박질을 끝내고 페이스 조절을 시작했다. 남은 마라톤을 잘 뛰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결승점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그러고 보면 연주도 그렇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정확성. 엉킬 땐 느린 템포부터 다시 연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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