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켜 준 그
약속을 지켜 준 그.
"애들은 내가 키울게. 엄마도 계시니까..."
"그래. 난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애들은 내가 잘 키울 거니까 걱정 말고 혼자만 잘 살아가라"
" 알았어. 애들한테만 잘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두 아이와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유달리 속이 깊고 올바른 애 어른이었다. 그런 아들과는 평소에 글로 소통을 자주 했다.
"엄마는 어떻게 저런 말을 쓰나요? 참 좋은 말을 쓰네요. 그래서 엄마가 읽는 책을 저도 다 읽었어요."
중학교 때 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들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저는 엄마가 지금처럼 사는 거 원하지 않아요."
속 깊은 아들이 해 준 말이다.
딸은 어릴 때부터 아주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외모는 예쁘고 가녀리게 보이지만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자전거도 잘 타고 유도도 잘했으며 노는 것도 좋아했다. 웃음이 많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피아노도 수준급으로 잘 쳤다. 내가 보기에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거실에서 할머니에게 꾸중을 들으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신나게 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나오는 아이였다. 무지개 빛깔 성격을 가진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 대신 멀리 가지 말고 창원에 있어야 해요."
나는 연년생인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장남의 아내이고 장손 집안의 며느리로 바쁘게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린 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너무 바빠서 화낼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거제도의 조선소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16년 만에 그를 만났다.
딸의 결혼식을 위한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나 늙지 않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몇 가닥의 흰머리가 보였고 살이 찐 그의 모습은 나이 들어가는 티가 역력히 보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어린 주인집 아들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기타도 잘 쳤으며 책 읽은 이야기를 곧잘 해주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학 다닐 때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으며 축제 때마다 사진전을 열었고 나는 그 사진 동아리의 부회원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의 나이 25살이 되던 해!
대학 졸업 전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이 바로 태어났다. 연년생으로 딸도 태어났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되었고 철없는 그를 사랑한 대가로 모든 육아와 집안의 대소사는 나 혼자 고스란히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참을성이 강하고 책임감 또한 강했으며 그 시절 옛날 방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칭칭 동여메 놓으면 그 냄비는 결국 폭발해버린다.
학창 시절 모습과 낚시에 빠져서 활기차게 바다를 누비던 모습만 생각했는데 흰머리가 보이는 모습을 보니 왠지 연민이 들었다. 영원히 늙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마음껏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다.
"일자씨도 늙었네"
내가 말했다. 일자라는 이름은 내가 연애할 때부터 불렀던 그의 별명이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서 말했다. 다행히 번창하고 있었다.
"민이는 대표이사 만들어 줄 거고 결혼할 때 아파트도 사 줄 거다. 을이는 이 정도 해 주면 둘이 공무원이니까 잘 살아가지 싶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그가 고마웠고 두 아이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고 있는 그가 더더욱 고마웠다.
그는 16년 전 우리가 헤어질 때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