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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Aug 25. 2024

죽지 않기로 했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삶을 움켜쥐었다.

그때 나는 매일 인터넷 검색창에 사별을 검색했다. 불시에 남편을 잃고 갓난아이를 키우며 방도를 찾아야 했고, 어딘가에 무너진 정신을 지탱할 것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불행 어떻게든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박함었다. 세상이 넓어 젊은 나이에 배우자와 사별해 어린 아기를 키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모두가 나였으므로, 나는 결국 나에게 위안을 얻었다.


내 팔을 베고 잠든 갓난아기의 작은 머리는 늘 축축했다. 산후조리를 위해 약하게 튼 에어컨은 일정 온도가 되면 습한 공기를 내뿜었다. 피곤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고, 사실 자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길었다. 울음은 시도 때도 없이, 예고도 않고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뒤에도 여전히 내 삶이 이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먹어야 했고 자야 했고 틈틈이 울면서도 시시때때로 웃고 떠들어야 했다. 심리적으로 심장이 뜯기는 것 같은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도 작은 생채기 하나하나 매 순간 아파서 어이가 없었다. 삶이란 게 그리 간사했다. 때때로 그 사람이 없는데도 숨 쉬며 살아가는 일이 곤혹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가 불가마에서 하얀 재가 되는 동안 나는 차가운 대기실 구석 바닥에 모로 누워, 내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던 신실한 친척 어른에게 물었다.

-신이 정말 있나요. 있으면, 대체 왜요? 왜 그 사람을요. 저한테는 대체 왜요.


대답을 바란 물음도 아니었지만, 어떤 말도 나를 위로하지 못할 것을 알았던 그 다정한 친척 어른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분은 그 순간 본인의 믿음조차 흔들렸을까. 아니면 내가 신을 믿어 그 모든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를 기도해 주셨을까.

 신을 믿을 수 있었으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른다. 신이 행한 일들은 모두 옳고, 그가 신의 곁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좀 나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불경하게도 원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끝내 믿지도 못했다.

눈앞을 뒤덮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삶을 움켜쥐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내내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했다. 어쩌다 한 번씩 그가 술을 먹고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집착하듯이 전화를 걸었다. 온갖 잡념이 내 마음을 흔들어 지옥에 담갔다 빼내는 과정들을 거치면, 내 걱정이 우습게도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 나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지옥 같은 일도 아무 사람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내가 어떤 최악을 생각하든 간에, 그것보단 더 나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혹은 오만함이었다.


 집착하듯 전화를 걸던 때엔 그래도 그가 안전하리라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사고가 있던 그날, 나는 오히려 그에게 딱 한 번 건 전화를 재빨리 끊었다. 행여나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제발 급한 일이 있어 못 받은 것이기를, 상황이 진정되면 전화기에 부재중 전화가 찍힌 것을 보고 내게 제일 먼저 연락해 주기를,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믿었고,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나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당신이 없으면 못 산다 했다. 장녀로서 늘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고 한없이 배려해야 했던 내 삶 속에, 나를 책임지고 배려해 주는 사람이 생겨서 고맙고 기뻤다.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결국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사람이 없어도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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