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주말을 친정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댔다. 옆 차와의 간격은 친정엄마와 아이가 여유롭게 내릴 수 있도록 항상 넉넉하게 둔다. 아이가 장난을 치느라 빨리 내리지 않자 친정엄마가 무심코 그럼 할머니 먼저 간다 하고 내리셨고 나는 별생각 없이 짐을 챙기며 빨리 나오라 했다.
6.25 전쟁이 왜 일어났냐면....방심해서.
그 짧은 사이, 쾅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니 설마. 아니어야 해. 나는 다급히 옆의 차 문을 보았는데 움푹까지는 아니지만 옴폭 패어 있었고, 절망스럽게도 그 차에 콕하고 찍힌 점은 내 차 색깔과 같았다. 꼭 맞춰보지 않더라도 그 찍힌 자리에 내 문짝 끝이 퍼즐처럼 들어맞을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망했다, 그냥 망한 거야. 나는 외제차를 티 안 나게 아주 살짝 긁고는 과오에 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한 아픈 과거가 있다. 불행 중 다행이랄지 이번엔 외제차는 아니었다. 어떡하지, 일단 튈까? 잘하면 아무도 모를 거 같은데. 억울하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닌데. 아니 잘못했지, 힘조절 못하는 만 네 살짜리가 혼자 차에서 내리게 내버려 두다니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공동현관까지 튀는 동안 몇 번을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마 그대로 공동현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서 있는데, 나의 눈치 빠르고 똑똑한 만 네 살 아이가 무려 조언씩이나 해주었다.
"엄마, 비밀로 하면 되지이"
아. 글렀다. 도망 못 간다.
나는 아이 손을 잡고 다시 차 있는 데로 돌아가 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민아, 이럴 땐 비밀로 하고 도망가는 게 아니고 고장 낸 걸 고쳐주어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 차 망가뜨리고 도망가면 안 돼."
그러자 아이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는 게 아닌가.
"나 자동차는 못 고치는데.. 레고나 블록은 고칠 수 있는데 자동차는 못 고쳐"
아하, 본인 보고 고치라는 줄 알았구나.
나는 어이없어 웃으며, "아니야, 네가 고치는 거 아니야, 엄마가 고쳐줄 거야" 했는데 그러자 이번엔 아이가 조금 신난 표정으로 "그럼 엄마가 고치는 거 보러 같이 갈래!" 한다.
불행에도 웃을 구석이 있다.
"하하.. 엄마가 직접 고치는 게 아니고 이 차를 고치는 돈을 엄마가 내는 거야...."
좀 찌그러졌는데 수리비용이 얼마나 들려나.
아이를 키우니 아이의 모든 행동이 내 성과 또는 허물이 된다.
이영도 작가의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용은 포자의 형태로 땅에 뿌려져 식물처럼 발화하여 용의 형상으로 자라난다. 그렇게 발화한 용은 키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키우느냐에 따라 영물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용을 키우는 일과 닮았다. 아이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키우는 일이 그와 같다. 양육은 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아이를 키운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또한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 성장의 방향은 바르고 곧으나 꺾이지 않는 부드러움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