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내 멱살을 잡았다
판도라는 상자 밑바닥에 남은 마지막 악을 꺼냈다
최초의 여인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가난, 전쟁, 슬픔, 질병, 증오와 시기, 질투가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상자를 닫았지만 이미 모든 악이 빠져나간 뒤였다. 상자 밑바닥에 남은 희망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를 꺼내주세요, 내가 있으면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판도라는 상자 밑바닥에 남은 마지막 악을 꺼냈다.
실종된 남편이 발견될 때까지 며칠간 나는 잠을 거의 못 잤다. 잠을 못 자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모든 현실이 꿈처럼 몽롱했고 귓가엔 웅성이는 소음들이 뒤엉켜 몹시 지쳐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어쩌면, 혹시나, 아니 제발. 당신이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건 혹독한 희망이었다.
남편의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은, 내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던 희망을 뿌리째 뽑아냈다. 오히려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짧은 며칠 동안에 헛된 희망 너머로, 맥없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희망이 없어지는 것은 삶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잘게 부서졌고 나는 도망치듯 잠에 빠져들었다. 끈적한 희망이 없어지고 나서야 찾아온 잠다운 잠이었다. 숙면은 아니었으나 생존에 필요한 만큼은 됐다.
남편의 네 번째 기일은 아이가 태어난 지 천오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 모처럼만에 나만을 위한 휴가를 썼다. 쉬고 싶다는 이유로 휴가를 쓴 게 참 오랜만이었다. 집에 고장 난 물건이 있다거나, 에어컨 청소를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아이가 아프거나 아이의 체험학습을 쫓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 이유. 뭐를 하며 보낼까 하다가 영화관에 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5년 전, 겨울왕국 2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즈음이었다. 배 속엔 어렵게 가진 아이가 있었다. 안전하고 행복한 시기였다.
그 해 겨울 코로나 19가 세상을 덮쳤다. 임신 중인 내게 낯선 전염병은 더욱이나 공포스러웠다. 혼돈의 시기를 틈타 자본주의 사회의 마스크가 30개에 9만 원이 넘어갔고 사람이 많은 곳은, 무료 마스크를 받기 위한 줄조차 꺼림칙했다. 그 재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지가 세상을 헤쳐 나갔다. 하루이틀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응급환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는 와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무심히 흘려버린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빠짐없이 소중해졌다. 이를테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삶이라든가, 타인의 입모양을 읽으며 나누는 대화 같은 것들이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이겨내려고 애썼던 어려움과 고통 저변에는 분명, 일상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포기하면 편했을 텐데, 희망은 우리를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써 우리는 마스크를 벗는 일상을 일부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은 잔혹하고 다정하다.
모든 것이 무너진 그날 이후로도 내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희망 탓이요, 희망 덕분이다. 가끔은 불행하고, 내게 시시각각 닥쳐오는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 고되지만, 아주 작아 흐릿한 불빛들이 내 삶 곳곳을 비추어 주길 바란다. 너무 어두워 길 찾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 그 한 조각 빛이 따스하고 힘 있는 위로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