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작가의 소설 '드래곤라자'에는 '마법의 가을'이라는 관용구가 자주 나온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를 말한다. 그건 좋은 일일수도, 나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건 간에 삶을 크게 뒤흔든다.
계절은 감정이 없어 무심하게 지나가고 때로는 그 무심함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여름이 지나갔다. 9월 말까지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하루를 기점으로 아침저녁의 공기가 선덕 해졌다.
올해는 내게 바쁜 한 해였다. 연초부터 바쁜 업무 몇 개를 떠안은 차에 정확한 일처리를 좋아하는 상사를 만나 애를 먹었다. 나름 꼼꼼한 성격이라 자부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자주 혼나 자신감이 떨어지니 아는 것도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기 시작했다. 한번 심하게 주눅이 들자 잘하던 일도 못하게 되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더 알아보겠습니다, 가 입에 붙었다. 가치관과 경험량의 차이겠지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들도 있었다.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일을 하면 효율이 떨어지고 괴롭다. 어디 가서 일머리 없단 소리 안 듣고 십수 년 사회생활을 해왔는데 상사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자꾸만 멍청한 짓을 하고 눈치를 봤다. 자신감 없는 부하직원의 말이 신뢰를 줄 리 없었다. 나는 정확한 정보를 말하고도 의심받았고, 내 스스로도 나를 의심하느라 한동안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간은 없는데 일을 쳐내는 속도가 더뎌졌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몇 달이 지나고 부서 이동이 있었다. 이번엔 아예 다른 업무를 맡게 되어 신입사원처럼 버벅댔다.
문제는 어려운 상사가 아니라 매번 몰아치는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누구를 원망하는 대신 나 스스로를 격려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잘하고 있고, 못하는 것도 결국 할 수 있게 될 거야.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 그 누군가가 기껏해야 나 자신일지라도.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지금이 마법의 가을인가, 한다. 사람은 마법의 가을을 지나 성숙해진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힘든 순간들 뒤로 경험이 고여 쌓이고 그게 양분이 되어 다음 고난을 버텨낸다. 그 과정을 수없이 거치다 보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이 경험이 내 자산이 될 거라는 건 안다. 그래도 역시나 경험치 부족이랄지 정신력이 약한 탓인지 경험을 쌓는 순간들이 괴롭고 쓰라리긴 하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도 성숙해지고 싶은 도둑심보에, 빨리 마흔 살이 되고 싶댔더니 친구들이 진지하게 심리치료를 권했다.
안다. 다 건너뛰어서야 성숙한 마흔이 될 수 없음을.
무심코 지나친 현재의 즐거움을 미래의 내가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왜냐면 내가 지금 무심코 지나쳤던 과거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는 중이니까.
만 네 살을 재우다 말고 고민상담을 시도했다.
-민아. 엄마는 엄청 세고 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어서 속상해.
그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한다.
-아냐 엄마 힘쎄. 가방도 혼자 들고 다니잖아. 자, 내 발도 들어봐(다리를 내 손위에 올린다. 나는 그 말랑하고 짧은 다리를 힘껏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한다) 봐봐 내 다리도 들어 올릴 수 있자나.
-고마워. 네가 엄마 아들로 태어나줘서 정말 좋다.
-나도 엄마가 내 엄마여서 고마워
마법의 가을은 언제나 있고, 내게 이 아이는 매 계절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