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목소리결핍자
큰 아이는 잘 울지 않는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에만 만나는 사이가 되어 버렸지만 그 흔한 입학 후 적응기간에 오는 스트레스로 나를 1도 힘들게 한 적이 없다. 엄마지만 엄마가 제 몸 챙기느라, 먹고 살기 바쁘느라 살뜰하게 다정한 엄마 코스프레는 얼토당토않다. 생존을 위한 달리기였지, 우아함을 위한 러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정말 가뭄에 콩나듯, 눈물을 터뜨릴 때가 가끔 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중간고사를 본 첫날이다. 전화기 너머로 눈물을 애써 참는 녀석을 느끼며, 나 또한 눈물을 참느라 코가 아프게 아려왔다. 아이 앞에서 그래도 엄마이니까, 어른이니까 센척하며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 펑펑 우는 녀석이 지금 내 품에 없다는게 너무 안쓰러웠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 같이 울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눈물을 참기 시작했고 감정표현 따위는 하지 않는 목석이 되어버렸다.친부는 입 꾹다물고 묻는 말에 대답 안하던 나를 더 많이 때렸다. 고집을 부리고 피운다는 이유로, 혹은 지엄마랑 똑 닮았다는 핑계로.
지난 주말에 다같이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정리하는 시간에 내가 물었다.
"00이는 힘들고 슬플 때 엄마 목소리 들으면 눈물이 나?"
"응,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지."
"아, 그래. 고마워. 엄마 목소리에 눈물이 나줘서."
난 할 수 없는것, 경험하지 못한 것.
마흔 다섯의 나에게 결코 죽을때까지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그것.
바로 힘들고 어려울 때,버티고 견뎌내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싶을 때 부를수 있는 "엄마" 그리고 울 수 있는 그 믿는구석.
외려 이벤트나 사건이 생기면 끝까지 숨기거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된 후 폭풍우가 지난간 뒤 알리는 통보정도하는 사이인 나와 내 엄마. 이제와 그 관계를 어찌해볼 여력이 나도, 엄마에게도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해 할 수 없는 진리가 되어버렸고
나는 반대로 내 생부와 생모를 마음속에서 지워갔던 것 같다.
'자식에게, 자식인데, 내새끼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의구심은 나를 철저히 혼자로 만들었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나에게 기댄다. 힘이 들때 내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난단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그러한 믿는 구석이 나라서, 아주 작은 미약한 기둥으로 서 있는 엄마가 되어 가는 내가 기특할 뿐이다.
배운대로 키운다고 했던가.
하루하루 배운대로 키우지 않기 위해, 본대로 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사람이 나라서 벅찰 때도 분명 있지만 나는 그래도 그 삶의 끝에 후회는 남기지 않으리라.
충분히 사랑하고
매우 사랑하고
흡족하게 사랑하고
빈틈없이 사랑하고
안전하게 사랑하고
후회없이 사랑해서
각자의 삶을 꽤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심지를 만들어줘야지.
나를 아주 조금씩 태워내더라도.
나처럼 중년이 되어도 우리 아이들이 기대어 울 수 있는 믿는구석이 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