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흔적일랑 남기지 말자

by 장용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첫 소절이다. 한국인의 유전인자에는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한 집착이 있는지 명승고적의 바위에는 옛사람들의 이름이나 시를 새긴 경우를 종종 본다. 오늘날에는 해외의 관광지에도 한국인 여행자의 이름이 낙서되어 가끔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흔적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보이는데 굳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그 심리가 궁금하긴 하다. 근거 없는 나의 견해지만 한국인의 강한 소유욕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건 같은 것은 내가 소유하면 그만이지만 대자연의 멋진 풍광은 소유할 수가 없으니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거나 낙서하여 그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리는 욕망은 아니었을까.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왜 사람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대자연의 일부로 보면 인간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존재임에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 같다. 특히 어떤 조직 내에서 권력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이 머무는 동안 업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흔적을 남긴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그건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후임자들이 보통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러나면 미련마저 깨끗이 지워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보인다. 퇴직하고 나니 그렇게 따르던 후배들이 전화 한 통 없다고 서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작 본인은 퇴직한 선배들을 깍듯이 챙겼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자신에게는 달라야 한다고 여기나 보다.


학교 교감으로 있는 동생이 들려준 얘기가 있다. 자신은 은퇴한 교장 선생들의 카톡 문자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했다. 답장을 안 하면 서운해할 것 같고 예의상 답장을 해드리면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안부 문자나 오늘의 명언 등에 성가심이 더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은퇴하면 후배들이 연락 오기 전에는 아예 연락을 안 할 생각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몸은 학교를 떠났는데 마음은 여전히 학교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측은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동생의 말을 들으니 그 자리를 떠나면 아무런 미련조차 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모 직원이 불과 8개월 전 내가 있었던 FC 영업채널의 조직 축소와 실적 부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답했다. 그 직원은 현장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하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난 그 영업채널과 함께 직장생활의 20여 년을 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돌아보고 싶지가 않다. 그 업무를 맡았을 때에는 정말 온갖 열정을 쏟아부었고 전국의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영업사원들과 함께 했었지만 그게 다였다. 나의 후임자는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 작업을 하였고 나는 우려 섞인 몇 번의 조언을 하다가 괜한 참견이다 싶어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만큼 애착이 강했던 일이었지만 떠난 마당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아서다. 그 직원에게 이렇게 한 마디는 해 주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다음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 올라야지.’ 비록 흔적은 남기고 싶지 않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 빛나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삶은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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