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집 앞 골목에서 두 발 자전거를 배운 기억이 있다. 엄마가 뒤에서 잡아 주시며 나와 남동생이 자전거를 익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이미 중학생이었으니, 사실 꽤 늦게 두 발 자전거를 배운 셈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어려서 그런지 나보다 훨씬 빨리 자전거를 익혔다. 나는 한참이나 헤매다가 겨우 두 바퀴 위에서 몸이 흔들리지 않는 정도의 감각만 얻었고, 그날의 연습은 거기서 끝났다.
그 뒤로 나는 자전거를 거의 타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남자친구와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탔던 것이 아마 그때 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시 탈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몸은 생각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서툴렀지만 곧 적응해 자전거를 달릴 수 있었다. 물론 잘 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몸은 흔들리고 마음도 불안했지만, 저녁 햇살이 좋은 날씨 속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달리는 순간만큼은 무척 들뜨고 행복했다. 넘어질까 두려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오랜만에 느낀 자유와 기쁨이었다.
독일에 와 보니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줄지어 달렸다. 자전거 뒤에 유모차 같은 트레일러를 연결해 아이를 태운 채 달리는 모습도 흔했다. 처음에는 자전거 도로와 보행 도로의 개념조차 몰라 자주 자전거 도로 위를 걷곤 했다. 그러면 멀리서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독일 사람들이 다가와 “여기는 자전거 도로예요”라며 비켜 달라고 하곤 했다. 그 덕분에 지금은 한국에서도 자전거 도로 위에서는 절대 걷지 않는다. 하지만 독일에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자전거 도로가 차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도시 안에서는 대부분 자동차 도로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늘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절대 자전거를 탈 수 없겠구나.’
같은 한인교회에 다니던 오빠가 독일에서 인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며 타던 자전거를 내게 주었다. 빨간색 자전거였는데, 너무 예뻐서 사실 잘 타지도 못하면서 얼른 받겠다고 했다. 당시 같은 기숙사에 살던 두 명의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과는 아주 가까이 지냈다. 그 두 사람도 이미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고, 내가 자전거를 받자 “주말에 같이 타러 나가자”라고 했다. 나는 겁이 난다며 잘 못 탄다고 했지만, 친구들이 친절하게 연습을 도와주었다. 기숙사 옆,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넓은 들판으로 나가 자전거를 배웠다. 중심을 잡는 건 괜찮았지만, 커브 돌기, 속도 내기, 브레이크 조절하기, 오르내리기 같은 동작은 계속 연습해야 했다. 독일은 자전거 속도가 워낙 빨라서 너무 느리게 타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안장이 높아 오르내릴 때는 그냥 앉아 페달을 밟는 게 아니라 몸을 살짝 점프하듯 올라타야 했다. 며칠간 연습한 끝에 드디어 실전의 날이 왔다. 셋이 함께 자전거를 타러 나가기로 했고, 나는 가운데에서 달리기로 했다. 앞뒤로 친구들이 지켜주니 조금은 안심됐다. 하지만 도로에 들어서자 옆으로는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도 오갔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친구들과 함께 달리다 보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커졌다. 그렇게 조금씩 자전거에 익숙해지면서, 나도 어느새 자전거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던 중 살짝 방향을 틀어야 하는 길이 나왔다. 그런데 독일의 길 위에는 트람이 다니는 레일이 있었고, 그 좁은 홈에 내 자전거 바퀴가 그대로 끼어 버렸다. 바퀴는 딱 맞게 들어가도록 파여 있어 방향을 바꿀 때는 직각으로 확 틀어야 했는데, 나는 무심코 사선으로 진입한 것이었다. 그 순간 자전거가 앞으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그대로 도로에 넘어졌다. 허벅지 앞쪽은 크게 까졌고, 통증이 심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러운 건 바로 뒤에 트람이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자전거를 도로 한편으로 옮겼다. 만약 그 순간 뒤에서 트람이 달려오고 있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사고는 내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상처의 아픔보다도, ‘트람이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이 나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자전거는 그렇게 내 삶에서 멀어져 갔다.
남편은 독일에서 내가 사는 곳과 다른 도시에 살았다. 작은 대학 도시였고, 그는 주로 자전거로 통학을 했다. 내가 주말이나 방학에 그곳에 갈 때면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고, 벼룩시장에서 내 자전거를 하나 사 왔다. 나는 트라우마 때문에 탈 수 없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며 걱정을 덜어주었다. 또 차와 함께 달리는 도로는 피하고 자전거 전용도로만 다니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끈질긴 설득 끝에 나는 다시 페달을 밟았다. 여전히 두려움은 있었고, 탈 때마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차에 치이면 어쩌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별일 아닐 행동이 내겐 큰 도전이었다. 매번 가슴이 떨렸고, 라이딩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남편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함께 탈 때면 속도를 천천히 하고 항상 앞서서 길 상황을 알려주었다. 앞에 사람이 있다든지 신호가 곧 바뀐다든지,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든지 사소한 것들을 미리 알려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작은 도시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속을 달릴 때, 두려움과 함께 자유가 밀려왔다.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너무나 행복했다.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자전거를 어떻게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다른 짐들과 함께 컨테이너에 실어 오기로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비싼 비용이 청구되었다. 업체에서는 자전거 부피가 크다며, 자전거를 빼면 80만 원을 아낄 수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산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자전거를 폐기해 달라 부탁했다.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한 채, 우리의 자전거는 그렇게 떠나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자전거를 탈 일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살면서 따릉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 부부는 늘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그러다 얼마 전, 우리는 복잡한 서울을 떠나 수도권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 댁 근처라 마음이 놓였지만, 대중교통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차가 없으면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타시던 자전거와 엄마의 자전거가 있었고, 언제든 필요하면 쓰라고 하셨다. 며칠 전, 날씨가 너무 좋아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근처 강까지 가 보기로 했다.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탄 뒤, 무려 2년 만에 다시 자전거를 잡았다. 처음엔 여전히 두려움이 앞섰지만,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강으로 향하는 길은 온통 자연이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여름 끝자락의 햇살은 따뜻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두려움과 자유가 뒤섞인 감각 속에서, 우리는 선물 같은 하루를 달리고 있었다. 독일 생각이 나며 가슴 뭉클한 기분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두려움이 없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잘 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극복한 것 같으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자전거를 탈 때면 늘 엄습해 온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나에게 두려우면서도 즐거운 일이고, 불안하면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일이다. 늘 걱정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과도 닮아 있다. 삶은 고단하면서도 행복하고, 절망적이면서도 보람되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며 나는 늘 생각한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바로 내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