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한민국 직장인 중 자기 일이 마음에 들어서 아침 출근길에 콧노래가 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일요일 저녁에 월요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는 일반 직장인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일이 무엇이기에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족쇄처럼 된 것일까요? 일을 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돈, 밥벌이 때문이겠지요. 어느 정도의 돈이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읽은 공무원 관련 기사에도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현역 공무원이라는 댓글 작성자는 공무원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힘들다면서 열심히 재테크 중인데 10억을 모으면 바로 퇴사할 거라고 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의외로 큰 부자들이 많습니다. 땅 부자도 있고 건물 부자도 있습니다. 워낙 부자라 하는 일도 마땅히 없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직업 같은 건 없고 굳이 하는 일을 찾자면 재산 관리 정도가 됩니다. 재산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인데 무슨 일을 열심히 할까요? 10억 정도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그 부자들은 하나 같이 속 터지는 문제를 가지고 상담실에 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큰돈은 언제나 인간관계 문제와 함께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은 가족 친지 간에 돈 문제로 얽혀 관계가 틀어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땅 부자인 50대 여성 여정 씨도 돈 문제에서 시작된 친인척 간에 갈등 때문에 상담에 왔습니다. 상담 중에 친인척에게 쌓인 분노를 풀어놓기를 몇 번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그가 말했습니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친인척 관계가 회복된다고 해도 자신이 다시 괜찮아질지 의문이 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문이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무기력했어요. 아주 오랫동안.”
친인척 간의 갈등 초창기에는 그 화 덕분에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는 게 느껴져 좋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함께 무기력한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정 씨는 무기력의 근원이 할 일이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먹고사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고 일상에 특별히 신경 쓸 것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되자 그는 자기의 존재감을 찾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이후 흔히 말하는 ‘배우자를 잘 만난 덕분에’ 부의 행운이 닥쳤고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여정 씨는 그저 집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처음에는 몸이 편하고 좋았지만 점차 자기를 잃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살짝 허전한 느낌이었을 뿐 자기를 잃어간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지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아무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자기 존재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정 씨를 떠올리면 비슷한 나이의 H씨가 떠오릅니다.
예전에 요양보호사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대처법에 관한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일하는 분들은 힘든 일상이 버거워 대부분 스트레스가 높았고 마음이 처져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월급도 얼마 되지 않는데 밤낮이 바뀌는 교대 업무를 하며 가끔은 막무가내식의 어르신들의 요구를 받아내는 것이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많이 공감이 되었지요. 그래서 한 분 한 분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힘들겠다, 고생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차례대로 몇 분이 지나가고 50대 초반의 여성 요양보호사와 마주했습니다.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눈빛이 유달리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던 그분이 H씨입니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신다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 그분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나는 이 일이 신성하다고 생각해요. 정말이에요.”
그 순간 힘주어 말씀하시던 그분의 반짝이던 눈빛이 뇌리에 새겨졌습니다. 그 눈빛은 한편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연민의 눈빛으로 볼 필요 없어요.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신성한 사람이에요.
다시 여정 씨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여정 씨는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요? 분노의 감정이 가라앉고 무기력에 대한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하는 동안 몇 달이 흘렀습니다. 상담이 종결을 향해갈 즈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시작했어요. 나를 되찾기로 했어요.”
여정 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큰돈에 덴 경험 때문인지 큰일보다는 작은 일이 자기를 되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정 씨와 H씨를 만난 이후 종종 생각합니다. 돈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구나. 그런 면에서 심리상담사는 참 좋은 '일'입니다. 큰 부자들을 만나 돈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종종 보고 정신을 차릴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일하기 싫어질 때가 오면 일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지요. 일은 사람을 신성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