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편지 1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by 나무둘

안녕하세요 여정 씨.

잘 지내셨나요? 호탕하게 웃던 그 모습은 여전한지 궁금합니다, 속이 터질 듯이 답답하다고 하면서도 크게 웃는 모습은 여정 씨의 트레이드 마크였지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정 씨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얼마 전 여정 씨와 비슷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과 여정 씨의 차이라면 약간의 나이 차이 정도가 있겠네요. 그분이 10년 정도는 여정 씨보다 젊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리고, 그분은 여정 씨보다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네요. 그분도 돈이 많았습니다. 젊은 날의 여정 씨가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생의 큰 경험과 감정선이 서로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 역시 큰돈을 떼이고 열이 나고 속이 터질 것 같다고 하셨지요. 그분도 여정 씨의 그때 그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리 보고 저리 보았던 그 마음. 돈을 떼이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복장이 터질 것 같았던 그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우리는 함께 보았지요. 쏟아내고 쏟아내도 고통의 시원이 마를 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엉뚱한 곳에서 아무리 땅을 파도 샘이 솟을 리가 없다는 것을 직접 겪어 나가셨지요.


문제로 가져왔던 그것이 해결돼도 삶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그 날. 그때서야 우리는 샘이 솟을 만한 땅에 다다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삶은 참 묘합니다. 문제로 둔갑하고 있는 포장지를 풀어보면 선물은커녕 다시 다른 문제를 내놓으니 말이지요. 상담을 받아도 진정 해갈이 되지 않던 이유는 우리가 포장지만 더듬고 있었기 때문일 테지요. 여정 씨가 겉포장을 뜯고 새로운 문제를 발견한 날, 허공에 떠서 동동거리고 있던 마음이 땅에 내려앉는 듯 차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처럼 익숙한 차분함. 그 차분함이 여정 씨를 이끌고 서서히 그리고 단호하게 마음을 다져 주리라 예감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문제의 발견만큼이나 여정 씨의 변화도 극적이었지요. 상담 중에 할 말을 잃어가는 것은 종결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 날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던 것들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느끼셨지요. 그 날도 여정 씨는 예의 그 모습처럼 호탕하게 웃으셨지요. 다만 이번에는 진심을 다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웃음이었습니다. 평상시의 허탈감을 남기는 웃음과는 사뭇 달랐던 여정 씨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맥을 제대로 잡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그 웃음. 이제 남은 일은 삽질뿐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정 씨를 변화시킨 것은 심리상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간단없는 의지, 무기력을 마주하고 고백할 용기가 없었더라면 상담은 거대한 목마름에 한 모금의 물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정 씨가 의지와 용기를 갖고 정말로 삽을 잡고 삽질을 시작했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삽을 잡은 것도 놀라운데 삽질의 시작도 알리지 않고 그 행위에 곧바로 뛰어든 여정 씨는 인생을 되찾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여정 씨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 줄곧 들어온 상담자로서는 여정 씨가 선택한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회적으로 괜찮은 자리 하나는 꿰찰 수 있었을 텐데, 남들이 웬만하면 기피하는 그런 일부터 시작해보겠다는 마음. 그 마음은 필시 삶을 돌려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돌려놓을 수 있는 삶은 없지요. 삶은 언제나 앞을 향할 뿐이니까요. 보상 받고 싶은 과거보다 훨씬 값진 자기의 삶을 선택한 여정 씨가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내 안의 온갖 분노와 원망을 뒤로 하고 삶에 내 몸을 갖고 뛰어들 때 삶은 그런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화답하는 것을 심리 상담을 하면서 많이 봐왔습니다. 심리 상담을 하다 보면 고통스럽고 괴로운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도 정성을 다하면 그 일이 신성해지고 사람이 존귀해진다는 것 또한 듣고 또 듣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한 사람이 자기 안을 굽어 살피면서 고통이 아니었으면 꺼낼 생각도 못했던 보물을 찾아내는 생생한 이야기도 자주 듣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삶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구석을 늘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정 씨 역시 여정 씨의 삶이 숨겨 둔 구석구석까지 들어갈 용기를 내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헤어진 이후로 손수 꺼내신 보물들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보물 탐사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고통을 상쇄할 만한 삶에 대한 열망, 나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삶은 어떤 식으로든 길을 열어 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상담 이후 여정 씨의 날들 역시 그러했으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여정 씨에게 삶이 더욱 친절한 손길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여정 씨를 뵌 지도 참 오래됐네요. 여장부 같은 그 웃음이 시원하게 계속되길 기원합니다.



여정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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