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기쁨도 한통속

by 나무둘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 중에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로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가지고 옵니다. 겉으로 드러난 분노, 좌절감, 죄책감, 공허함 등 감정의 속에는 늘 슬픔도 함께 있습니다. 상담실에 찾아왔지만 슬픔을 곧바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슬픔을 최대한 감춘 채 상담실에 와서 한참 동안이나 애써 잘 사는 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슬픔을 묻어둔 채 상담실을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요새 자꾸 이유도 없이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데 제가 우울한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겠지요. 기쁘고 활기찬 사람이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질문의 정답은 정해져 있지만 내담자의 정답은 다릅니다. 내담자가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일 테지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의 우울감은 누구나 느끼는 거예요.”

내담자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답이 아닌 답을 듣고 싶어 상담실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상담실에 찾아온 30대 여성 슬기 씨도 그런 경우입니다. 슬기 씨는 자기 안에 이미 슬픔이 가득하지만 그것이 슬픔이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사소한 일에도 슬픔이 넘쳐흐르기 시작해 그제야 상담실을 찾아온 것이지요. 자기 내부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슬픔이나 우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살면서 겪은 여러 큰일도 잘 넘겼는데 기껏해야 찬바람 좀 부는 겨울이 되었다고 슬퍼지는 자기 모습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사람이 슬플 수도 있냐고 물은 슬기 씨는 정작 상담 중에 살면서 우울했던 경험들을 끊임없이 쏟아냈습니다.

“보통 사람이 견디기 힘든 삶을 사셨네요. 혹시 사는 내내 많이 슬프지 않았나요?”

상담자의 이 질문에 슬기 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슬픈 게 뭔지 모르겠어요.”


슬기 씨가 슬픔 속에서도 슬픔을 알 수 없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큽니다. 자신의 슬픔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눈물을 뚝 그치라고 말하던 부모님 아래 크면서 슬픔을 있는 그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위로 한 마디 못 듣고 슬플 땐 견뎌야 한다는 말만 듣고 자란 슬기 씨에게 슬픔은 어떤 감정일까요? 슬픔은 느껴서는 안 될 매우 생소한 감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한 번도 친해져 본 적이 없는 슬픔이기에 슬픔은 두렵기까지 한 감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설과 영화 시리즈로 나온 <해리포터>에서는 누군가 악의 화신 ‘볼드모트’를 언급하려고 하면 다른 이가 입막음을 합니다. ‘볼드모트’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잠자던 악을 깨우고 불길한 기운을 끌어온다고 생각해 아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해리포터의 세계에서 ‘볼드모트’는 암묵적 금기입니다. 그처럼 슬기 씨에게도 슬픔이란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느껴서도 안 될 금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금기의 대상인 슬픔은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이제는 그 정체를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슬픔이었을 그 감정은 다가가기조차 두려운 감정이 됩니다. 정말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와 꼭 닮았지요.


누가 들어도 견디기 힘들었을 차가운 부모의 시선 속에 자라온 슬기 씨는 자기의 슬픔을 그렇게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몸은 분명히 슬픔으로 가득 차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그는 슬픔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몸과 마음 사이에 어떤 막이라도 하나 단단히 쳐 있는 듯했습니다.

슬기 씨에게는 알 수도 없고 명백하게 느낄 수도 없는 슬픔이기에 먼저 슬픔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매 상담시간마다 슬기 씨는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떤 날에는 상담자가 단지 안부를 묻는 말에도 눈물을 흘렸지요. 오늘은 괜찮아서 울지 않을 것 같다고 상담 시작부터 운을 뗀 날도 어김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슬픔과 친해지는데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슬기 씨가 말했습니다.

“심장이 뛰는 것 같아요.”

그날도 한참을 울다가 그치고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이 뭔지 조금씩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난날 상담 경험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언제부턴가 상담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살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느낌이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외면당했던 슬픔과 함께 가라앉았던 기쁨이라는 단어가 그동안 흘린 눈물이 바다를 이루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슬픔을 감지할 수도 없었던 슬기 씨는 자기의 슬픔을 포기하지 않은 덕에 기쁨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마땅히 느꼈어야 할 모든 슬픔을 만나자 기쁨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기쁨을 소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휴지가 필요했는지 웃으며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눈물, 콧물 닦느라 쓴 휴지를 갚으라는 상담자의 농담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바라보며 한 마디 했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한통속이네요.”


저도 말했습니다. 슬기 씨가 끝내 슬픔을 포기하지 않아 저 또한 기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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