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기쁨도 한통속
안녕하세요 슬기 씨.
잘 지내셨나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단정한 청바지 차림. 슬기 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상담 받는 내내 한 번도 빠짐없이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오셨었지요. 오늘도 그 옷차림으로 일하실 슬기 씨를 떠올려 봅니다.
슬기 씨를 생각하면서 블라우스와 청바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상담실에서 나눈 이야기의 굴곡이 꼭 블라우스와 청바지의 조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품이 넉넉한 블라우스와 몸에 딱 맞는 청바지는 슬기 씨가 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슬픔을 묻어 두고 사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온갖 애를 쓰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슬픔만큼 나를 안으로 흠뻑 젖어들게 만들고 급물살의 갑작스러운 소용돌이마냥 나를 가두고 헤어 나올 수 없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물살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헤엄쳐 나오느니 처음부터 슬픔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사는 것도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슬기 씨도 슬픔에 젖어들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사셨지요. 집안일과 직장일을 병행하는 와중에 틈틈이 여러 가지를 배우러 다니면서 보통사람들이라면 진작 나자빠졌을 만큼 열심히 사셨지요. 그것이 슬기 씨의 안간힘이었나 봅니다. 슬픔을 대면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자신을 최대한 소모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 몰아 넣어가며 자기 안의 슬픔과의 만남을 피하셨지요.
슬기 씨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합니다. 슬기 씨도 수줍은 듯 어색하게 웃던 자신을 기억하시는지요? 상담자와의 첫 만남에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웃어 보였지만 파리한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지요. 친절한 듯 보이지만 속을 내비치지 않는 웃음. 자기를 가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웃음에서 오히려 슬픔의 저수지에 물이 차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담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슬기 씨 안에서 그토록 막아서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입고 오셨던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는 옷의 주인이 드러내기 싫은 감정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군데도 뭉치지 않고 흐늘대는 섬유조직은 마음의 움직임도 그런 상태라고 대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마음껏 품을 넓히고 싶은 블라우스가 조금의 여지도 없이 일자로 똑 떨어지는 청바지를 만나 갈무리되는 것을 보고는 ‘넘치려고 하는 슬픔을 담기에는 잔이 너무 작다.’고 연상했다면 상담자의 비약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요? 가두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감정이지요. 마음은 울고 있지 않은데 눈물이 왜 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는 슬기 씨를 보면서 작은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살아있는 감정은 결국 나를 살게 만들 테니까요.
울고 싶지 않지만 이미 울고 있는 눈물을 자꾸 삼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슬기 씨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는 마음과 울지 않으려는 마음의 계속됐던 줄다리기. 슬픔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안간힘 끝에 우리는 줄다리기를 놓는 법도 배웠습니다. 눈물을 닦던 휴지를 쥔 손에서 힘을 빼면서 꼭 쥐고 있던 마음의 줄도 내려놓을 수 있었지요. 눈물의 길을 따라서 마음이 흐르도록 가만히 둘 수 있게 되자 슬픔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지요. 상담시간 내내 흘러나오는 슬픔을 함께 느끼면서 그 동안 거대한 슬픔에 떠내려가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버티고 버텼을지 실감이 됐습니다. 참으로 정당한 안간힘이었습니다.
그 정당한 안간힘은 돌로 굳어 오랫동안 슬기 씨의 심장에 박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정당한 안간힘 때문에 스스로 얼마나 숨을 막아놓고 살아왔는지요. 겨우 숨만 쉴 정도로 마음의 창을 열어놓고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슬픔을 막아버리면 당장은 슬프지 않아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단지 슬픔만 막히는 것이 아니지요. 딱딱하게 굳은 슬픔은 끝내 삶도 막히게 합니다. 오랫동안 자기 감정을 막고 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슬기 씨의 슬픔이 쉼 없이 흐르던 그때부터 슬기 씨 안의 아이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고 느꼈습니다. 슬기 씨의 촉촉한 눈망울에서 그 아이를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마음껏 울고 싶었을 아이. 아이들이 자기 존재에 의심이 없는 이유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를 드러내 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던 안간힘을 거두어들인 마음이 어찌나 고운지요. 얼굴에만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눈물이 흐르게 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지요? 눈물은 대지를 따라 흐르며 삭막했던 마음의 곳곳에 물을 대주고 시들어 있던 온갖 잡풀과 잡꽃들을 다시 싱싱하게 깨어나게 했지요. 슬기 씨가 슬픔도 기쁨도 한통속이라고 말했던 그것. 슬픔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의 바다에 완전히 젖어서 슬픔을 껴안고 춤을 추는 것. 기쁨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과도 같았던 슬픔. 슬픔은 화사하게 피어나는 기쁨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슬기 씨, 요즘은 어떤 슬픔과 어떤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시는지요? 혹여나 삶이 고단해 다시 스스로 마음을 막아서고 싶은 날이 오거든 우리가 함께 느끼고 배운 상담시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이라는 눈물이 흐르면 기쁨이라는 꽃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기원합니다. 앞으로도 슬픔을 껴안고 기쁘게 춤을 추며 살아가시기를, 슬기 씨의 블라우스가 시원한 삶의 바람에 산들산들 마음껏 춤출 수 있기를.
▼ 슬기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