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오.'입니다. 이제는 심리학 지식이 많이 대중화되어 이성만큼이나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압니다. 그렇지만 상담과 강의 중에 만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알고는 있는데 대부분은 머리로만 알고 있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지요. 정작 자기 삶에서 적용하는 것을 보면 그보다 심각합니다. 사실은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40대 여성 미진 씨가 상담실에 와서 건넨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너무 짜증이 나요. 이런 기분 제거해버릴 수 없나요?"
그가 짜증나지 않게 해달라고 짜증스럽게 말했습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나. 그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고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섬뜩했습니다. 제거라는 단어 자체도 기계적인 표현인데다가 기분을 제거하겠다는 발상은 다소 기괴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자 직업을 갖고 있는 미진 씨는 겉보기에는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이었습니다. 여태껏 잘 살아오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매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괜찮았다가 그 다음날은 신경이 곤두서면서 예민해지고, 또 그 다음 하루는 괜찮아지는 식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했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짜증을 견딜 수 없어 직장에서도 문제가 몇 차례 생기자 미진 씨는 심리상담을 통해 짜증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몰두하며 성장한 미진 씨는 인간관계를 '불필요하지만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부모님은 오로지 공부만을 강조했고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미진 씨를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주었기에 그는 더더욱 공부에만 매달려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정 따위를 느끼면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즐거운 기분조차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머리가 지나치게 발달한 분들께 가끔 이런 현상이 보입니다. 이성 기능이 워낙 탁월한 나머지 감정 기능은 발달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성과 감정의 두 정신적인 기능의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상담실에 와서도 자기 감정과 거리를 두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미진 씨의 모습은 계속됐습니다. 그가 상담에서 원하던 것도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상담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과 위로를 받을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색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어서 빨리 짜증을 없애서 '정상적인' 직장 생활에 돌입하고 싶어 했지요.
심리상담은 결국 자기 속내를 이야기하고 자기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기에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심리상담은 오히려 불편한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미진 씨 역시 자기가 생각했던 심리상담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몇 차례 상담을 그만두려고 했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인간관계의 괴로운 일이 터져서 그나마 자기의 고통을 솔직하게 쏟아낼 수 있는 상담을 계속 오게 됐습니다. 지지부진한 심리상담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저는 미진 씨에게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물었습니다.
"감정은 거추장스러워요. 알 수 없고 모호한 기분만 들어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짧게 한 마디하고는 이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럴 때는 그딴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무언의 시위가 느껴졌지요. 감정에 대해서는 철통 같은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던 미진 씨. 그 마음의 장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건 이 질문을 받고 난 이후였습니다.
"짜증을 제거하면, 그래서 다시 그 삶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삶의 모습인가요?"
그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상담실이 침묵으로 가득 찼습니다. 생각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말 한 마디 없이 꽉 찬 밀도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짜증을 제거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삶을 제거하고 싶어요. 이렇게 사는 건 너무 지쳐요."
그리고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에 와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지요. 솔직한 감정을 꺼내 놓은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그 이후 미진 씨는 한동안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두세 달이 지났을 무렵 그가 다시 상담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을 제거하고 싶다는 말을 저 스스로 했다는 것에 충격이 컸어요. 그리고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어요. 나중에 깊이 생각해보니, 짜증을 제거하면 제 삶이 제거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일단은 거기까지는 알게 되었다며 이제 무엇을 해야 되냐고 그가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전의 그 질문을 다시 했습니다. 당신에게 감정은 어떤 것인가요? 똑똑한 그가 그다운 대답을 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는 말, 맞아요. 머리로만 사는 반쪽 삶은 그만하고 싶어요. 이제 가슴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