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편지 4

짜증 폭발의 속마음. 이성은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까

by 나무둘

안녕하세요 미진 씨.

잘 지내셨나요?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생머리. 어려보이는 얼굴. 언뜻 보면 대학생이라 착각할 정도로 나이보다 한참 젊어보였던 미진 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첫 인상과 대조되는 비싼 코트와 핸드백, 약간 짙어 보이는 화장. 전반적으로 풍기는 세련됨이 없었다면 40대 중반인 미진 씨의 나이를 한눈에 분간하지 못했을 겁니다.


얼마 전에 그 핸드백을 다시 만났습니다.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상담자가 보기에도 많이 비쌀 것 같던 그 핸드백. 미진 씨의 핸드백과 똑같은 색상에 똑같이 각진 모양이었습니다. 고급스러움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딱딱함. 각지고 딱딱해서 물건을 보관하는 본래 기능도 떨어지고 가지고 다니기에도 불편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까지 미진 씨의 핸드백과 똑같았습니다. 핸드백을 꼭 쥐고 있던 미진 씨의 모습이 기억났습니다. 미진 씨의 말아 쥔 두 주먹은 내면의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는 듯 보였었습니다.


상담실에서 건넨 첫 마디를 기억하시나요? 짜증을 제거하고 싶다는 말. 그 말에도 짜증스러움이 배어 있었지요. 그동안 상담실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첫 마디였습니다. 인사말도 생략한 채 곧바로 감정을 제거하고 싶다는 말에 놀라며 잠깐 긴장이 됐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담을 하게 될까.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짜증을 제거하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짜증에 담긴 속마음은 무엇일까.


사실 짜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표현하는 감정 중 하나입니다. 가장 만만하고 가장 쉽게 표출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가장 값싼 감정이 짜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감정. 아무데나 흥정되는 감정. 다른 모든 부정적 감정을 싸잡아서 하나로 퉁치는 감정이 짜증입니다. 짜증은 다른 부정적 감정의 속내를 감춘 채 가장 먼저 둔탁하게 튀어나옵니다. 미진 씨가 제거하려던 짜증도 표면으로 삐쭉 얼굴을 내민 감정의 싹이었을 뿐. 사실 긴 시간 땅 아래에서 길러온 뿌리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겉으로 나온 싹을 따라 뿌리까지 가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지요. 우리가 함께 미진 씨의 짜증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길에 수도 없이 많은 잔돌들이 가로막았지요. 감정인 듯 하지만 듣다 보면 생각인 것들. 감정으로 포장된 생각들. 그 잔돌들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었습니다. 짜증이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지요. 수많은 생각들로 본심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짜증의 역할입니다. 그러면서도 방해물 같은 생각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건넵니다. 미진 씨가 그토록 짜증이 났던 이유도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미진 씨의 내면에 잔돌 같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고작 이런 삶이란’이라고 외치는 듯 했습니다. 핸드백을 꼭 쥐고 있던 주먹. 왠지 값비싼 핸드백을 휘둘러 세게 내리칠 것 같다는 상상. 삶에 시위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진 씨의 삶, 명문대 출신의 ‘사’자 직업에 탁월한 전문성을 유지하는데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려서부터 공부만을 강요받았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부를 잘했기에 감정 따위는 제쳐놓고 살아온 세월. 그렇게 성장한 미진 씨가 성공가도에 걸리적거리는 짜증을 얼른 도려내고 싶어 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상담에 처음 왔을 때부터 미진 씨가 내리쳐 버리고 싶었던 것은 짜증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삶의 허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상담실의 그 흔한 공감과 위로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일축하려는 태세.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정상’의 삶으로 재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말. 이 모든 게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아온 미진 씨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지요. 이성으로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는 게 계속 가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또 얼마나 위험했을까요? 그 위험을 무의식적으로는 감지하셨나 봅니다. 수차례 상담을 그만두려다가도 그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괴로운 인간관계가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으로 단단히 구축해 왔다고 생각한 자기 삶이 이미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이대로의 삶이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지 되묻는 과정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생각의 둑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명징하게 알았던 날이었지요.


그날, 짜증을 제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제거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고는 한동안 상담에 오지 않으셨지요. 상담을 중단한 마음이 짐작이 되면서도 그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두어 달 후 다시 찾아오셔서 이제는 짜증과 한 몸이 된 자기 삶을 잘 살아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느끼셨겠지만 그때 눈빛이 예전과 달리 반짝였습니다. 수많은 생각과 말이 필요 없는 눈빛. 눈빛은 이제 이성이 감정과 손을 잡았다고 알리는 듯 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허울이 벗겨진 눈으로 미진 씨의 삶을 되돌아보며 내면에 더욱 깊이 뛰어들 수 있었지요.


머리로만 사는 반쪽짜리 삶이 아닌 온 삶을 찾으려 다시 돌아온 상담, 종결을 항해 가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핸드백을 상담실 탁자에 가만히 올려놓는 모습이었지요. 더 이상 핸드백을 꼭 쥐지 않아도 되는 여유. 편안하게 내려놓은 두 손으로 이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거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지요. 다시 시작된 상담에서는 더 적은 이야기를 했지만 더 많은 것이 오고 갔습니다. 핸드백을 내려놓고 손을 펼친 미진 씨의 용기 덕분에 예전처럼 수많은 생각과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진 씨도 저도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잘 들을 수 있었지요.


미진 씨, 행복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바쁜 날에는 상담에서 그랬듯이 핸드백을 살짝 내려놓고 열린 두 손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미진 씨가 어떤 선택으로 어느 길을 가시든 이성과 감정이 한 목소리를 내는 그런 삶이길 기원합니다.



▼ 미진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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