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편지 6

꼿꼿하지 못한, 우리의 영원한 우정

by 나무둘

안녕하세요 선남 씨.

잘 지내셨나요? 이름 그대로 착한 남자처럼 보였던 대학생 선남 씨. 선남 씨의 동그랗고 앳된 얼굴과 목소리, 여성스러운 손짓이 기억납니다. 마치 매니큐어를 확인하듯 손가락에서 손끝까지 죽 펴는 제스처. 남자들은 잘 하지 않는 그 섬세한 동작은 선남 씨의 감정 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주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선남 씨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득 오래 전에 집에서 키우던 고무나무가 기억납니다. 고무나무는 실내에서도 잘 산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때를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물을 많이 준 탓에 그 고무나무는 어느새 생명을 다한 듯 보였습니다. 뿌리에서 가장 가까운 잎부터 하나둘씩 떨어지며 화분에 수북이 잎을 쌓아가던 그 식물. 잎 무덤을 헤치고 아직은 파릇한 줄기 아래쪽을 잡고 흔들자 뚝심 없이 심하게 휘청대는 것이 뿌리가 썩은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제 그만 그 식물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서 인근의 뒷산에 가서 묻어주듯이 심었습니다. 어떻게든 살려면 살겠지, 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한 달여 뒤 다시 간 그 자리에는 고무나무가 버젓이 살아있었습니다. 고무나무의 매끈한 잎이 햇빛에 반짝였습니다. 그때 배운 게 하나 있었습니다. ‘줄기가 서 있으면 살 수 있다.’


여린 가지처럼 곱게 뻗은 손가락. 선남 씨의 손동작을 떠올리다가 기억이 여기까지 미쳤습니다. 선남 씨의 고운 손이 이리저리 허공을 헤맸던 것은 멀리 뻗어 나온 가지가 원 줄기를 찾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 줏대를 세우고 싶은 마음을 내 손가락은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선남 씨가 친구를 향해 품었던 관심과 사랑은 무수히 뻗은 나뭇가지와도 같았습니다. 상담실에서 내내 반복되었던 공치사. 선남 씨가 친구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잘 챙겨주었는지 매 회기마다 이야기를 하셨지요. 친구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에는 자기 원룸으로 불러들여 거두어 먹이고 혹시나 밥을 굶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 동아리 모임을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 친구를 챙기던 일련의 행동. 그렇게 자기 보살핌을 받던 친구가 장학금을 받아 기숙사에 들어가고 여자친구가 생긴 뒤로 연락이 뜨음 하자 주체할 수 없었던 마음. 그리고 그 뒤로 더욱 지극해진 선남 씨의 관심과 사랑. 우리가 만난 상담 시간의 대부분은 선남 씨의 사랑 이야기로 채워졌었지요.


심리상담에는 아쉽게도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옵니다. 내가 해주고도 내주고도 응당 보답 받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억울함과 분함. 그 감정을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상담실에서나 풀어내는 그분들은 착한 사람입니다. 내용은 각기 달라도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저런 일을 겪었다.’는 요지는 비슷합니다. 그 마음의 하소연을 하고 또 하다가 그들은 돌연 침묵을 만납니다. 어떤 지점에 이르러 스스로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합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희생을 내가 자처했구나. 오랫동안 나 스스로 피해자의 배지를 달고 살아왔구나. 선남 씨도 상담 중에 꼭 같은 지점을 지나셨지요.


배신감과 분노를 낙인처럼 새기고 살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날, 긴 시간 지속됐던 침묵. 침묵이 깊어질수록 겹겹이 둘러싸여 깊숙이 숨은 상처의 속살이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침묵을 깨고 하셨던 몇 마디에 놀랐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친구의 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비겁했다는 고백. 나뭇가지의 흔들림도 줄기가 서 있기에 흔들리는 것이지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며 사방을 울려대던 선남 씨의 마음도 그 즈음 중심이 서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게가 실린 자기 고백과 함께 내 멋대로의 관심과 사랑으로 친구를 괴롭혔던 것에 대해 친구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마음이 참 간곡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의 관심과 사랑이 늘 선(善)일까.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이 타인이 원하는 것과 맞갖지 않을 때에는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뜻하지 않는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타인을 향한 나 자신의 욕구로 인해 자기 자신이 흔들리게 된다고 하지요. 이 뼈아픈 진실을 몸소 체험한 선남 씨가 상담을 잠시 쉬어야겠다고 했을 때 그 쉼은 이제야 줄기가 바로 선 묘목이 땅을 더욱 굳게 다지는 시간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친구에게 요구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줏대를 세우러 떠난 시간. 잠시의 쉼 뒤에 다시 찾아온 상담에서 그 시간이 정말로 그러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지요.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이제 새로운 취미를 시작한다고 하셨지요. 비겁했던 자기를 다시 꼿꼿이 세우고 싶다며 선택한 취미, 꽃꽂이. 섬세한 선남 씨다운 선택에, 그동안 함께 나눈 이야기의 일맥을 관통하는 듯한 ‘꽃꽂이’에 함께 웃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선남 씨, 쉽지 않은 상담 과정을 잘 지나가셨습니다. 누구에게라도 어려웠을 테지만 착한 남자 선남 씨에게는 더욱 어려웠을, 자기의 모순을 바라보는 작업을 잘 마치셨습니다. 그 과정을 다 마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선남 씨의 섬세함은 자기 안의 모순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모순을 해체하는 길도 잘 찾아가도록 도왔던 것 같습니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시절에도 내 마음의 가지를 흔들며 애타게 줄기의 중심을 찾아갔던 시간. 그 시간 끝에 꼿꼿이 생명을 지탱하고 선 줄기의 삶. 애써 겪은 그 시간 덕에 선남 씨 인생의 다음 시절에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선남 씨의 섬세한 마음이 예전처럼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는 그 줄기가 얼마나 단단해졌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자기만의 섬세함을 통해 더욱 꼿꼿하게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시 한 구절을 들려드리며 편지를 마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중



▼ 선남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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