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적
나는 21살이 되던 봄부터 꾸준히 성당에서 초등학생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주일학교 교사다. 어쩌다 보니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5년이 넘게 계속해서 봉사하게 되었고, 매주 일요일, 성당에서 아이들을 만나지 않으면 한 주가 찝찝하고 우울해질 정도로 그 봉사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 봉사다.
특히 나는 오래된 교사로서 책임감이 무거운 일들을 종종 맡아서 하곤 했는데, 스쿠터 사고가 났던 2019년에는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 예식 준비를 도와주는 ‘첫 영성체 반 담임교사’를 맡아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첫 영성체는 가톨릭에서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처음으로 받아먹는 예식이다. 예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첫 영성체 교리교사는 1년 동안 천주교의 전체적인 교리를 빠짐없이 가르쳐야 하므로 까다로운 자리이다.)
다행히 스쿠터 사고는 예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야 일어났기 때문에, 주일학교 일정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주일학교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일까. 나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다만 첫영성체 예식이 10월 즈음 끝나고 나면 12월에 있을 성탄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가 아이들을 봐줄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그해의 아이들은 유독 말썽꾸러기가 많았고 그 아이들이 모두 우리 반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동료 선생님들이 우리반 아이들을 유독 힘겨워했고, 성탄제 준비에 곤욕을 치르고 계셨다. 물론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해주셔서 우리반 아이들이 멋진 성탄제 무대를 준비할 수 있었지만.
매주 일요일 오후가 되면 동료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주셨다. 오늘은 누가 어땠고, 누가 어땠고, 하며 내가 궁금해할 소식을 전해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내가 없어도 주일학교가 잘 돌아가는구나. 하고 약간의 시원섭섭한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선생님마다 “민경쌤 빈자리가 커요~”하는 인사말을 해주곤 했다.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성당에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했다.
사건은 성탄제를 한 주 남겨두고 시작됐다. 재활치료를 막 시작해서 목발을 짚고 화장실 정도는 혼자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때 쯤이었는데, 치료에 진전이 보이자 슬금슬금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치료를 조금 더 열심히 받으면 다음 주에 있을 성탄제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상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목발을 짚고 성당에 찾아가 예쁜 우리 아이들이 준비한 노래와 춤을 보며 함께 박수치고, 수고했다며 한 명 한 명 안아주는 상상. 그 상상만으로도 벅찬 가슴을 느끼며 당장 엄마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엄마는 망설이다가, 의사 선생님이 허락하신다면 차로 성당에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외출? 그래요.”
그리고 정말로 허무하게 의사 선생님께서 외출을 간단히 허락해주셨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성탄제 날까지 다리를 열심히 단련하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목발을 짚고서 화장실 정도는 다닐 수 있었지만, 밖의 휴게실이라도 나가거나 복도를 돌아다니면 곧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에 금방 병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까지도 여전히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판도 혼자서 가져다 놓질 못해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옆 침대의 할머니께서 도와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외출 허락을 받은 그 날부터 치료실에서 가장 열심히 운동하기 시작했다. 치료실 선생님들이 의아해하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을 하곤 매일 억지로 치료를 해 나가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힘차게 페달을 밟아대니 말이다. 나의 목표는 고통도 기쁨으로 바꿔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치료하며 눈물이 아닌 땀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다리를 움직이면서 오로지 성당에서 아이들을 볼 생각만 했다.
운동이 끝나면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야외 테라스로 나가거나 치료실 옆의 작은 성당으로 들어가 땀을 식혔다. (가톨릭 병원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조용한 성당에 혼자 앉아 숨을 헐떡이며 성탄제에 꼭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게 유일한 내 하루의 낙이 되었다.
간절한 마음은 날 잠시도 쉬게 두지 않았다. 치료실에만 다녀오면 기진맥진해서 나머지 시간에 항상 누워만 있었던 내가 이제는 복도는 물론이고 혼자 휴게실에 가서 물까지 떠올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아이들을 보고 싶다는 그 하나의 생각으로 이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리고 결국 기적처럼 성탄제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렌즈도 끼고, 입술도 빨갛게 칠하고, 엄마의 도움을 받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당을 향해 출발했다.
생각보다 다리가 아프면 불편한 게 많았다. 차에 탈 때는 다리를 접기가 힘들어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어야만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목발을 짚고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바깥세상의 바닥은 참으로 울퉁불퉁했다. 장애물도 많고, 갑자기 푹 꺼지는 땅에 발을 잘못 짚었을 땐 너무 아파서 욕까지 나왔다. 이런 세상에 장애인이 살아가는 것은 매일 전쟁과도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아픈 나도 이런데, 평생을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고 있을까?
잠시 절망에 빠질 뻔했지만, 엄마의 도움으로 무사히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 아이들이 간식을 먹던 장소가 대기실로 변해 있었다. 그 공간 구석에 앉아있는데, 무서울 정도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꾹 참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에는 곧 무대를 앞둔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왔다.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아이들에게도 소문이 퍼졌는지, 나를 보자마자 괜찮느냐는 안부부터 물어봐 주었다. 어린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들으면 생각보다 가슴이 많이 찡하다. 눈물이 또 나오려고 하기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이윽고 성탄제가 시작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을지 상상하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얼굴을 곱씹으며 힘찬 박수와 환호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성탄제가 끝나고 몇몇 나를 알아본 어머님들이 짧은 탄성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그리고 곧이어서 아이들 몇 명도 “선생님!” 하며 달려와 안겼다. 잠깐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반가워해 주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잠시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성대한 관심을 받았고, 내가 이렇게 사랑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 같다. 그 짧은 하루는 앞으로의 내 병원 생활도 기쁘게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큰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귀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